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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의 여왕, 역전의 여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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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엘리자베스 타워’로 곧 이름이 바뀌게 될 ‘빅벤’ 앞의 웨스트민스터 다리는 구경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인근 다른 다리도 인파에 점령당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비까지 흩뿌렸으나 여왕이 탄 바지선과 뒤따르는 1000척의 배가 이루는 장관을 보러 나온 시민들은 꼼짝 않고 자리를 지켰다.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여왕의 배가 다가오자 이들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2일부터 시작된 나흘간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제 둘째 날의 런던 풍경이었다.

 버킹엄궁 앞 광장에서의 콘서트, 여왕의 마차 행진 등으로 이어지는 축제를 위해 평일인 4, 5일은 공휴일로 정해졌다. 국가 예산으로 쓰이는 전체 행사 비용은 1200만 파운드(약 216억원). 어려운 경제 사정을 감안해 조촐하게 치르기로 했다는 게 이 정도다. ‘천년 왕국’을 이어온 마흔 명의 왕 중에서 60년 이상 재위에 있었던 경우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이룬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두 번째라는 것이 이 성대한 축제의 배경이다.

 실제 권력으로서의 왕권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마당에, 논리적으로 매사를 따지기 좋아하고 집단 행동에 냉소적(축구는 제외)인 영국인들이 이런 왕실 이벤트에 관대하거나 열광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주변 영국인들의 답은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된다. ①여왕이 나이가 들수록 인기를 더 얻고 있다. ②왕실 운영에 세금이 많이 들지만 관광 수입이나 국가 브랜드 가치에 대한 기여를 고려하면 남는 장사다. ③빠르게 변하는 세상 때문에 변하지 않는 전통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졌다.

 ③이 가장 맘에 들기는 하지만 셋 다 정답일 것 같다. 여왕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가장 훌륭한 왕’ 1위(35%)로 뽑혔다. 영국의 전성시대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이 2위(24%)였다. 실속 계산도 셈법이 틀리지 않은 듯하다. ‘브랜드 파이낸스’라는 기관에 따르면 왕실의 브랜드 가치는 80조원에 달한다.

 선왕 조지 6세의 서거로 스물 여섯의 공주가 왕위에 오르자 많은 영국인들은 왕실의 미래를 불안하게 여겼다고 한다. 실제로 여러 위기가 있었다. 여왕의 네 자녀 중 셋이 갖가지 추문 끝에 가정을 파탄 냈을 때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찰스 왕세자에 버림받았다고 영국인들이 여기는 다이애나비의 요절은 왕실을 천덕꾸러기로 만들었다.

 그러나 여왕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꾸준히 해외를 돌며 54개 영연방 국가의 결속을 다졌고, 600개 넘는 단체의 후원자 활동도 지속했다. 한 해 평균 400개의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총리에겐 과거의 경험을 조용히 전해주는 ‘내조의 여왕’ 역할에 충실했다. 그 결과 왕실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되찾은 ‘역전의 여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