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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실패국가를 추종하는 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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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남윤호
정치부장

얼마 전 제법 먹고산다는 친구들을 만났다. 대기업 간부도 있었고, 전문직 종사자도 있었다. 몇몇이 4·11 총선 때 정당투표에서 통합진보당을 찍었다고 털어놨다. 사회정의다, 진보적 가치다, 하며 나름 이유를 댔지만 밑바닥엔 해묵은 부채의식이 있지 않았나 싶었다. 학우들이 데모하며 두들겨 맞고 구속당하는 동안, 도서관에서 고시공부 하던 사람들 마음 한구석에 있던 그 찜찜함 말이다. 통합진보당의 정당득표율 10.3%의 상당 부분은 여기에서 나왔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통합진보당 부정경선과 종북(從北) 논란은 그 친구들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걔들이 그런 애들이었나, 하며 혀를 차는 모습에서 허탈감이 묻어났다. 최근 이런저런 여론조사에서 통합진보당 지지율이 확 빠진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부채의식에서 출발한 낭만적 진보의 환상이 산산조각 났다는 얘기다. 보수 입장에선 이거 하나만으로도 통합진보당이 큰 일을 해준 셈이다.

 국회에선 종북 의원 등 무자격자를 내쫓으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여야 합의로 추진한다 하니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제명한다 해서 끝난 게 아니다. 4년 뒤, 8년 뒤, 종북 성향의 후보가 또 당선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지역의 일꾼’이란 가면을 쓰고 ‘장군님의 일꾼’으로 매진하는 이가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개념상 종북세력은 북한이 있는 한 존재한다. 현실적으로도 통합진보당이 아무리 종북에 이끌려 다닌다 해도 지지율이 0%로 추락하진 않을 것이다. 소득격차와 양극화, 그리고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심해질수록 극단적 좌파가 자생할 여건은 남는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먹히는 사회는 종북의 좋은 번식처다. 게다가 그들은 세대를 이어 씨를 퍼뜨린다. 공부 깨나 했을 법한 대학생들이 통합진보당 옛 당권파 편에 서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그 생존력을 목격하지 않았나. 그뿐인가. 민주통합당에서도 ‘탈북자=변절자’라고 말하는 이가 의원 배지를 달았다.

 그들이 존중하는 북한은 이미 실패한 나라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Why Nations Fail』이란 책은 북한의 실패 이유를 ‘착취적 제도’에서 찾는다. 공저자인 대런 아세모글루 MIT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 하버드대 교수는 ‘포용적 제도’를 성공과 번영의 열쇠라고 본다. 한국이 그에 해당한다. 두 저자는 상반된 체제에서 남북의 10대 청소년들이 뭘 생각하고, 어떤 인생을 설계할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그러곤 묻는다. 삼성과 현대가 왜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여러 내부 모순에도 번영의 엔진을 꺼뜨리지 않은 남한, 그리고 빈곤과 폭정에 시달리는 북한은 이 책의 논지에 딱 맞는 비교대상이다.

 하지만 그런 실패국가를 좋다고 추종하는 이들이 실제 있는 걸 어쩌겠나. 북한은 수령을 뇌, 당을 심장, 인민을 손발에 비유한다. 우리 내부의 종북은 촉수쯤 될까. 뇌가 있는 한 촉수는 잘라도, 잘라도 나온다. 실패국가에서 뻗어 나오는 불결한 촉수들이 우리의 포용체제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어느새 여기저기 단단한 진지를 구축해 놨다. 이젠 거기서 장기 농성전이라도 벌일 태세다.

 이 한심하지만 엄연한 현실 앞에서 척결이나 발본색원 같은 으스스한 공안 용어는 쓰지 말자. 그들을 인정하자는 게 아니다. 분노에 불타 무리하다간 반드시 역풍을 부르는 법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에게도 민주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게 민주주의의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종북 의원이나 무자격 의원의 제명도 철저히 민주적 절차에 입각해 공정하고 투명하게 할 수밖에 없다. 무슨 여야 정치협상이나 선거전략 차원에서 흥정하듯 할 일이 아니다. 단발성으로 끝낼 일도 결코 아니다. 종북의원의 국회 입성을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어느 선에서 막고 어느 선까지 용인할지에 대해 19대 국회 임기 내내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실패국가를 추종하는 무리가 21세기의 국회를 드나든다는 건 우리 국민에겐 적잖은 고통이다. 그 통증이 한 번 앓고 마는 몸살로 끝날지, 평생 따라다니는 지병이 될지, 19대 국회 하기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