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야오방 관료부패 견제 시스템 추진 자오쯔양 공산당 정치국원 선거제 구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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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호 06면

1989년 6월 4일 벌어진 천안문 사태의 직접적인 계기는 그해 4월 15일 사망한 전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의 추모 열기다. 정치개혁과 자유화를 실천하려 했던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대학생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발적으로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모여들면서 지속적인 시위로 이어졌다.

중국 정치개혁 꿈꿨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이들을 진압하기에 앞서 당시 총서기를 맡고 있던 자오쯔양(趙紫陽)은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평화롭게 풀려고 시도했다. 강경한 대처를 주장했던 실권자 덩샤오핑은 결국 평화적 문제해결을 시도했던 자오쯔양을 해임했으며, 전차를 앞세운 인민해방군 병력이 광장에 진입해 시위는 결국 유혈 참극으로 막을 내렸다.

먼저 총서기에 오른 후야오방은 공산당 전제(專制)의 요소를 헌법과 법질서 속에서 가능한 한 제한하는 한편 공산당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민주적인 공간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던 인물이다. 티베트 문제 등 소수민족 현안에 대해서도 각 소수민족이 자치구를 직접 관리하는 방임주의 입장을 천명해 한족(漢族) 중심의 중국 정치권 내부에서 강한 불만을 사기도 했다.

아울러 관료 부패를 견제하기 위한 감독 시스템 도입, 최고 지도부 구성원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는 결국 1986년 베이징을 중심으로 확산 추세에 있던 대학생들의 자유화 시위와 관련해 과도한 자유화를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기에 이르렀다. 덩샤오핑이 이끄는 당시의 공산당은 이런 시위 등을 ‘자산계급의 자유화 요구’로 간주한 뒤 ‘반(反)자유화 운동’을 펼쳤다. 그 배후로 지목된 후야오방은 87년 모진 당내의 비판에 시달린 뒤 낙마했다.

자오쯔양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그도 후야오방에 이어 총서기에 오른 뒤 정치개혁에 관심을 보였다. 전임자인 후야오방의 정치적 지향과 매우 흡사한 생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발전은 반드시 정치개혁과 함께 펼쳐져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밀실 담합 형태인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 정치국원의 구성과정에 선거제를 도입하자는 식의 개혁조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평가다.

두 사람은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 초기에 강력한 동반자였으나 정치개혁을 꿈꾸다가 ‘경제발전 최우선’의 덩샤오핑 노선에 밀려 결국 정치적으로 희생됐다는 점에서 정치발전을 희망하는 중국 국내외의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후야오방은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을 만들고 이끌었던 주역으로, 공청단을 기반으로 성장한 현 중국 공산당 총서기 후진타오(胡錦濤)의 ‘정치적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 총리인 원자바오는 1986년부터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있으면서 당 총서기 자오쯔양을 보필한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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