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제 이제부터 더 높이 난다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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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업들은 인터넷 분야를 선도한다고 많이 알려져 왔다. 이는 지나친 과장일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자동차·화학 등 구시대 기업들을 위한 최초의 대규모 기업간 전자상거래(B2B) 네트워크가 등장한 것은 겨우 지난해이며 그 가운데 일부 B2B 벤처기업들은 이미 실패했다.

반면 ABB·다임러크라이슬러·지멘스 같은 유럽의 유서깊은 다국적 기업들은 B2B 부문에서 미국을 앞서가고 있다. 지멘스의 고객들은 휴대폰에서 기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이미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다.

지멘스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사실상 회사를 재정비하고 있다. 지멘스가 현재 건설하고 있는 새로운 신경중추 E-엑셀런스 센터는 부품 구매에서부터 직원들(45만명)간의 정보 공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처리할 것이다.

CEO인 하인리히 폰 피에러는 센터 구축에 10억유로가 소요되지만 완공 첫해에만도 16억유로의 경비가 절감되며 그 이후 절감액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멘스는 신경제의 모범이 된다. 유럽은 현재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신경제 신봉자들로 가득하다. 유럽의 학자들과 기업인들은 지난 5년간 미국 경제를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린, 하이테크에 의한 급격한 생산성 증가의 비결을 캐내기 위해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다.

유럽 각국 정부들도 신경제의 꿈을 안고 법률·교육 등 모든 분야를 재점검하고 있다. 빔 뒤센베르크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비롯한 유럽 지도층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기대하고 있다.

필리페 마이슈타트 유럽투자은행(EIB) 총재는 “나는 낙관적인 편이다. 유럽은 대체로 미국에 뒤져 있지만 몇몇 분야에서는 미국을 신속히 따라잡고 있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해 유럽에 신경제는 없다. 적어도 미국적인 관점에서의 신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1990년대 유럽의 생산성 증가율은 미국의 3분의 1인 약 0.5%에 불과했다. 기술을 원동력으로 한 신경제의 평가 기준(PC 보급·인터넷 사용자·하이테크 기업인·신생기업·벤처 자본가들의 수치)에 따라 미국과 여타 선진국들을 비교하면 유럽과 일본은 미국에 훨씬 뒤져 있다.

유럽이 뒤처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획기적인 신기술이 등장해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기까지는 대체로 수십년이 걸린다. 그 기간은 옥스퍼드大 경제학자 폴 데이비드의 이름을 따 ‘데이비드의 지연’으로 알려져 있다.

데이비드에 따르면 기업들이 신기술을 채택하면 혼란스런 과도기를 겪게 되며 그 기간 중 기업이 효율적으로 변화해가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美 실리콘 밸리에서 시작된 정보기술(IT) 붐이 최근에야 미국 전역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아 IT 붐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확산되기까지는 당연히 좀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데이비드는 “유럽도 유사한 과도기를 거칠 것이며, 생산성은 4∼5년 후에야 급상승할 것”으로 전망한다.

많은 유럽인들은 미국의 경제기적이 부분적으로는 신기루라는 생각에 흥미를 느낀다. 1995년 이후 미국은 IT 생산성이 컴퓨터의 처리능력과 똑같이 증가한다고 가정했다. 예컨대 미국 회계사들은 가격이 1천달러인 컴퓨터의 처리 속도가 1년만에 배로 증가하면 그 컴퓨터의 가치를 5백달러로 ‘평가절하’한다(가격은 50% 감소하고 생산성은 그만큼 향상한다).

유럽 국가들이 그런 식으로 회계 방법을 수정한다면(또는 조작한다면) 생산성은 상당히 증가할 것이다. EIB의 경제전문가 패트릭 밴후트는 그럴 경우 IT 투자에서 미국의 우세는 8대 1에서 불과 2대 1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회계장부 조작만으로 격차를 좁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4년 전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주식 시장에 소규모 급성장 기업들을 위한 거래소가 설치됐다. 융통성 없는 구경제 은행들 같았으면 귀를 기울이지도 않을 참신한 사업 아이디어에 자금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해지자 불안해진 각국 정부는 법인세를 삭감하고 창업社들을 옭아매는 형식적 절차들을 간소화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들은 유럽 대륙에 혁명을 일으켰다.

독일 비텐大 경제학자 비르게르 프리다트는 미국인들에게 인터넷은 돈을 버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지만 유럽인들에게 “신경제는 신사고를 의미하며 새로운 기업인 세대를 탄생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은 미국을 따라잡고 있다. 미국 산업계에서 생산성 급증의 일등공신은 실리콘 밸리의 대표적 상품인 실리콘칩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유럽에는 세계 10위권에 드는 반도체 제조업체가 하나도 없었다.

현재는 네덜란드의 필립스社·독일의 인피니온社·스위스의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3개나 된다. 워싱턴 소재 반도체산업협회 회장 조지 스칼리즈는 “10년 전만 해도 반도체 업계에서 유럽 업체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당당한 경쟁사가 됐다”고 말한다.

다음 단계는 반도체 기술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1990년대에 미국의 IT 투자 비용은 유럽의 倍 수준이지만 이 격차는 곧 좁혀질 전망이다. 메릴린치社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유럽 기업들은 올해 IT 부문 지출을 13% 늘릴 계획인데 이는 미국의 3배 수준이다.

최근 설립된 네덜란드 국제 인포노믹스 연구소의 뤽 소에트 소장은 유럽이 무선 기술 부문에서 미국보다 훨씬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닷컴 기업들의 잇따른 도산도 유럽 대기업들의 e비즈니스 분야 벤처 투자 붐을 막지는 못한다. 몸을 사리기 시작한 미국 회사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냉혹한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후 유럽의 창업 현장은 생기를 되찾고 있다.

스웨덴의 안데르스 울스트란드(27)는 닷컴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 지난해 11월 울스트란드는 또래 동료 2명과 함께 래디컬 파크라는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는 닷컴 기업들의 도산으로 인해 손해를 본 벤처 자본가들을 위해 자칭 ‘응급실 서비스’를 해주는 컨설팅 업체다.

울스트란드는 “문제는 인터넷 신생업체들이 펀더멘털을 간과한 데서 비롯됐다. 17세기부터 비즈니스의 기본 요소는 불변이었다는 사실을 지난 2년간 우리 모두가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울스트란드는 고객社들이 기본으로 돌아가 비용을 절감하고 수익 창출에 역점을 두며 유럽 전역에서 파트너나 합병 상대를 찾기 위해 팜 파일럿을 두드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옥스퍼드大 경제학자 데이비드는 유럽 기업들이 궁극적으로는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을 통해 미국보다 높은 생산성 증가를 이룩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한다. 유럽 기업들은 세탁물을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종업원들의 제복에 칩을 심어 놓으며, 프랑스 웨이터들은 주방에 주문을 빨리 전달하고 음식값 계산을 신속히 하기 위해 무선 통신을 이용한다.

데이비드는 재택근무도 상당한 붐을 일으킬 것으로 내다본다. 미국보다 비싼 도로 및 사무실 유지 비용, 공해 방지 비용 등을 재택근무를 통해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유럽 각국 정상들은 리스본에서 ‘닷컴 회담’을 갖고 미국을 능가해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으로서 거듭날 것을 다짐했다. 또 회사들이 IT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새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약속했다. 그 이후 유럽 지도자들은 전자상거래용 전자서명을 만들고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들이 유럽 각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마이슈타트는 “일부 유럽 정부들은 기술을 경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쉬운 방법이자 정치적으로도 편리한 방법으로 본다. 그러나 신축성 없이는 신경제도 있을 수 없다”고 경고한다.

각고의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뜻이다. 유럽이 안고 있는 만성적인 문제들은 시장 원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지속적인 번영을 위해서는 기업이 근로자들을 고용하거나 해고하기가 까다롭게 만드는 법규들, 또 의욕적인 근로자들이 새 기술을 연마하고 활용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경직된 노동 법규들을 손질해야 한다. 또 참신한 아이디어가 있는 곳에 투자해야 한다.

정부는 연구개발(R&D)을 국내총생산(GDP)의 일부로서 지원해야 한다. 이 부문은 미국에 현저히 뒤떨어져 있다. 교육에도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교육이야말로 지식 기반 경제에 걸맞은 직종으로, 꾸준히 변화하는 노동력을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과 노고가 따를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이미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조만간 미국이 유럽 스타일을 연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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