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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영화 감상하다 야한 장면 잘린데 분개하던 친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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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43)과 나는 아주 오랜 친구다. 가끔 우리 사이를 아는 이들이 “신은경씨는 어떤 사람인가?”하고 물을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격이 있는, 품위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한마디 덧붙인다. “슬기롭고 강한 사람”이라고.
KBS에서 우리는 만났다. 아나운서였던 신은경과 기자였던 나는 분야는 달랐지만 매일 마주치곤 했다. 전국의 남성 팬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KBS 9시뉴스를 본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스타였다. 그러나 보도본부에 오는 그녀는 소탈하고 겸손했다. 그리고 말이 적었다. ‘말 공장’에서 말 수가 적은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선했다.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필요없는 말을 일절 하지 않는 그녀를 어떤 이들은 ‘차갑다’ ‘냉정하다’ 심지어 ‘거만하다’라고까지 했지만 그녀와 함께 일해 본 이들은 모두 다 그녀를 칭찬했다. 왜냐면 지켜볼수록 그녀는 괜찮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신은경과 가까워진 것은 일요일에 하던 ‘지구촌의 지금’이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그녀는 앵커였고, 나는 PD였다. 일요일에 일한다는 것은 나 같은 워커홀릭에게도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침 7시에 나와 김밥을 먹어가며 종일 편집을 하고, 온갖 기사를 손질하고, 방송을 시작하고, 마침내 마지막 시그널이 나갈 때면 신이 났다. 왜냐면 내겐 월요일의 달콤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경에게는 쉬는 날이 없었다. 아침 라디오 진행, 그리고 9시 뉴스, 또 일요일에는 ‘지구촌의 지금’ 진행 등. 그녀는 일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휴가도 없이 일했다. 나는 놀랐다. 아무도 그녀가 3백65일 쉼 없이 일하는 것을 몰랐지만, 그녀는 불평 한마디 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한 프로그램에서 일하면서 나는 그녀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알게 되었다. 눈에 안 띄게 사람들을 배려했고, 누구보다도 일찍 와서 멘트를 다듬었다. 나는 서서히 ‘그래, 저 여자는 프로야’라고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서서히 직장 친구에서 개인적 친구로 바뀌어갔다. 함께 ‘야한 에로영화’를 보러 갔다가 야한 장면은 다 잘라버린 데 분개하며 웃기도 했고, 워낙 말이 많고 생존(?)이 어려운 경쟁사회에서 ‘끝까지 버티자’고 격려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스타’였던 신은경인지라 끝없는 소문과 질시에 시달렸지만 나는 그의 입에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흠 잡는 것을 듣지 못했다. 기껏해야 “참 알 수 없어. 왜들 그러지?”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의 ID는 ‘winsek’-‘승리, 신은경’

'버티기’로 했던 우리 인생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리의 20대가 KBS에 바쳐졌다면, 30대는 세상과 정면에서 만났다. 신은경은 그 소용돌이를 ‘부드러운 강인함’으로 풀어나갔다.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이상할 정도로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나는 도쿄 특파원으로, 그녀는 오랜 앵커 생활을 접고 영국 유학을 갔다.

나의 도쿄 특파원 발령에 “여자 아닙니까?”라며 이의를 제기했던 이들 때문에 나는 이를 악물고 일했다. 혼자서 싸늘한 방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렸던 일은 앞으로 내 인생에 또 있을 것 같지 않다.

나의 친구 신은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사람들 때문에 많은 상처를 입고 영국으로 갔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영국에서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전화도 없이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격려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나무에서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나눴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떨어질 수 없다’고 편지를 보내면 그녀는 ‘죽어도 나무 위에서 죽자’고 답장을 해왔다. 우리는 서로 죽을 힘을 다해서 사는 모습을 통해 끈끈한 동지애로 묶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신은경은 박사가 되었고, 나는 도쿄 특파원을 무사히 마치고 ‘일본’이라는 새 브랜드를 갖게 되었다. 신은경이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결혼했다. 또 KBS를 나와 한 케이블TV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회사에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 신은경이었다. 회사 앞이라고 했다. 한 3년만에 만난 그녀는 몹시 말라 있었다. 그녀가 날 찾아온 것은 지금은 남편이 된 ‘박본’(박성범 전 의원을 나는 아직도 직장상사였던 그의 직책대로 박 보도본부장이라고 부른다) 때문이었다.

박본으로부터 결혼하자는 말을 들은 그녀는 내게 “이유가 뭘까?”하고 물었다. 두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본 나는 말할 수 있었다. ‘사랑’ 때문이라고. 당시 박본은 KBS를 나와 칩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내를 잃었다. 그 때 박본에게 서울 중구 지구당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정치인이라는 험한 길을 함께 갈 길벗으로 신은경에게 청혼을 한 것이었다.

나는 “‘왜?”를 묻는 그녀의 커다란 눈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한마디에 그녀가 겪었던 사랑의 고통과 좌절과 쓰라림이 내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깊이 박본을 사랑하는가를 가슴이 저미도록 알았다.

누구나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중구에서 박본이 당선됐다. 아마도 신은경과 나는 당선을 1백% 확신했던 ‘유이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신은경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조용히 최선을 다하는 신기한 힘이 있다. 그 에너지는 조용히 따스하게 덥혀져 주위사람을 품어 안는다.나는 그녀를 존경한다. 내가 도저히 못할 일을 그녀가 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국회위원 마누라는 절대로 못한다. 목사 마누라, 유학생 마누라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이를 정도다.

그러나 신은경은 정치인 마누라 노릇도 너끈하고 능청스럽게 잘해냈다. 가끔 전화하면 “무척 재밌어” 할 정도다. 사이다 병에 숟가락 꽂고 노래도 하고, 할머니들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지역구의 아픈 이들에게 침을 놓기도 한다. 또한 아이의 존재를 통해 더욱 깊고 따스해지고 넓은 인간으로 성숙했다. 우리는 ‘늙은 엄마’라는 공통분모로 어떤 유치원이 좋고 그림책이 좋은가 서로 고민을 교환한다.

잘 살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도 나는 항상 안타까웠다. 박사학위에 그 수많은 커리어, 무엇보다 일에 대해 열정을 지닌 그녀가 ‘신은경’으로서 사는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결혼정보회사인 ‘듀오’의 대표이사직을 권유받았다고 했을 때 나는 너무도 기뻤다. 그녀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능력 있고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결혼정보회사를 이끈다면 모든 남자와 여자가 최고의 출발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학자 야시로 나오히로는 집 장만보다 더 큰 투자는 ‘결혼’이라고 했다. 이 ‘가정주식회사’는 운영의 묘에 따라 번창도 하고 파경을 맞기도 한다. 그 든든한 출발점에 그녀가 서 있다면 그 ‘가정주식회사’는 속이 알찬 회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술을 마셨을 때 누가 운전을 해줬으면 좋은가?” 물으면 나는 신은경의 이름을 말하겠다. 그리고 가슴 아픈 일이 있어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겠다. 또 기쁜 일이 있을 때도 그녀와 나누고 싶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듀오의 CEO인 그녀의 ID는 winsek. 승리, 신은경이다. 뭔가가 예고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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