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프로리그엿보기] 중국 C-League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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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의 뜨거운 축구 열기

마침내 1994년 4월 17일 사천성 청두(成都)에서 랴오닝 팀 대 스촨첸싱 팀의 개막전으 로 갑A팀 리그는 닻을 올렸다.

1994년 아시안게임이 있는 관계로 월드컵 기간에도 리그 를 병행하였지만 출범 첫 해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홈팀이라는 개념은 중국 축구의 잇 따른 실패에 실망하여 축구장을 떠났던 관중들을 다시 불러들여 갑A팀 리그의 경기당 관중 입장 수는 1만6천500명에 달할 정도로 엄청났다.

프로 리그의 뜻하지 않은 성공과 더불어 중국 대표팀이 1994∼1995년 사이에 삼프도 리아, 아스날 등 유명 외국 프로팀과의 상업 경기에서 거둔 승리는 중국 대륙의 축구 열 기를 날이 갈수록 뜨겁게 솟구치게 하였다.

마침내 1995년 시즌 경기당 관중 수는 2만3 천700명, 1996년에는 한 단계 더 올라 2만4천300명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1994년 프로 리그의 출범과 동시에 특기할 만한 사건은 중국 축구협회에서 중국 축구 선수들이 '선 자리에서 수비하고 걸어서 공격하는' 현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쿠퍼테스트 를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실시 첫 해에 국가대표팀의 주전을 포함한 42명의 선수가 쿠 퍼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리그 출전 자격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는 축구 선수이지 육상선수는 아니다"라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지만 중국축구협회는 폐단보다 이득이 더 많다고 판단, 이 원칙을 고수하였다.

두 차례의 세대 교체

비록 명색은 프로 리그였지만 출범 초기의 중국 프로 리그는 그야말로 아마추어의 흔 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두 차례의 세대 교체를 걸치는 동안 점차 진정한 프로 로 접어들고 있다.

첫 번째 세대 교체는 1995년 랴오닝 팀이 갑B팀 리그로 추락하면서 벌어졌다. 중국 축 구계의 랴오닝 시대에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랴오닝 팀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3년까 지 중국 축구계의 우승컵을 싹쓸이한 최강의 팀이었지만 프로로 전향하는 과정에 있어 적절한 관리가 뒤따르지 못했기에 젊은 축구 인재들이 전국 각지로 유실될 지경에 처했다.

머지 않아 팀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1995년, 2부 리그로의 추락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야 말았다. 한편 1994년부터 1998년까지의 5년 동안 갑A팀 리그 판도는 우수한 선수를 보유하고 아낌없는 투자를 앞세운 다렌완다와 상하이선화, 베이징궈안의 3강 구도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1999년에 들어서면서 산둥루넝 팀이 갑A팀 리그 우승컵을 안는 이변이 생겼다. 더불어 랴오닝 팀과 예전의 중하위권 팀인 스촨첸싱 팀과 충칭룽신이 2∼4위를 하는 등 기존의 3강 구도를 완전히 깨뜨려버렸다.

특히 갑B팀 리그에서 올라온 랴오닝팀이 평균연령 23세의 선수들로 일약 2위로 치고 오르면서 새로운 세대 교체를 예고하였다.

이는 또한 적응 능력이 강한 어린 선수들의 패기가 아직도 아마추어의 티가 남아있는 나이 든 선수들의 경험을 압도한 것으로 중국 프로 리그가 서서히 걸음마 단계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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