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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유럽 재정위기와 공동체 정치의 시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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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유럽 재정위기의 여파로 다시 세계 경제는 수렁에서 허덕이고, 요동치는 그리스 사태에 따라 한국의 주식시장도 널을 뛰고 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 시장의 세계화는 이번과 같은 비상사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제도나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60여 년 전에 마련된 이른바 브래튼 우드(Bretton Woods)체제가 21세기 지구촌의 새로운 정치, 경제 문제와 도전에 대응하는 데 있어 그 효능의 한계를 심각하게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세계 재정위기는 경제의 영역을 넘어선 포괄적인 위기로 그 중심에는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국가, 지역, 세계라는 여러 차원에서 당면한 이번 위기는 결국 공동체의 건전성을 시험하는 시련으로 인식돼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물론 그리스의 재정파탄과 이에 흔들리는 유럽의 재정위기다. 대중의 복지 요구를 무책임하게 수용한 정치권과 방만한 국가경영으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누적을 방치한 정부가 오늘의 그리스 사태를 초래했다는 일반적인 판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른바 ‘포퓰리즘의 저주’로만 과연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5월 초 중국의 톈진에서 열렸던 전직내각수반회의(InterAction Council) 30주년 모임에서 콘스탄티노스 시미티스 전 그리스 총리의 설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태의 일차적 책임이 물론 그리스에 있음은 시인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재정위기의 원인은 유럽경제의 남북 간 격차에서 찾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작금의 유럽 재정위기는 근원적으로 유럽연합(EU)의 남북 간 격차, 즉 경제 발전에 앞서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중심국들과 발전에 뒤떨어진 주변국들 사이의 구조적 격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의 단계와 수준이 다른 두 그룹 사이에는 현저한 경쟁력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 사이의 경쟁은 원천적으로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주변국들에서 쌓여가는 지속적인 무역적자 원인의 하나로 주변부에 위치한 남쪽의 국가들은 선진 중심국가들로부터 우수한 품질의 비싼 하이테크 제품들을 수입하는 데 비해 북쪽에선 훨씬 가격이 낮은 남쪽 국가들의 전통적 제품들을 사들이는 통상의 불균형을 지적하며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한 일련의 정책과 조치의 결과가 결국 과도한 국가채무로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미티스의 주장도 상당한 논거와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나 당면과제는 위기촉발의 책임을 규명하는 것보다는 국가부도의 위기에 몰린 그리스와 여타 주변 국가들의 어려움을 덜어주어 유럽 및 세계경제의 평형을 되찾는 데 있다. 공동체의 존속이 문제가 될 만큼 위급한 상황으로 판단한 EU는 그리스에 획기적 긴축정책과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상당한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해결의 패키지를 마련해 널리 수용되는 듯싶었지만 사태는 그리 만만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 과도한 재정긴축은 심각한 불황으로 이어지게 되며 급격한 복지지출의 감축은 광범위한 대중의 저항에 부닥친다는 상황의 논리가 현실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을 비롯한 새로운 성장정책을 경제위기 극복의 중심축으로 내세운 올랑드 사회당 후보가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불과 수주일 내에 유럽의 분위기는 긴축과 성장의 균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복지 확대, 재정 건전성 제고, 성장동력 촉진이란 삼위일체 정책을 과연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가는 유럽을 넘어 우리 시대의 최대 과제라고 하겠다. 이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제정책의 기술적 측면보다는 이웃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각자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할 용기가 있느냐 하는 국민들의 공동체 정신과 이를 공공정책으로 구현시킬 수 있는 공동체 정치 및 리더십의 존재 여부가 관건이라는 것이 지금의 유럽 재정위기가 보여주는 교훈이다.

 94세의 노구를 휠체어에 의지하고 톈진 모임에 참석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란 처참한 파괴와 악몽에서 벗어나 꿈과 땀으로 함께 키워온 유럽공동체를 반드시 지켜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결국 가족, 이웃, 국가, 지역, 지구촌이란 공동체의 단위가 커질수록 공동체의식은 흐려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공동체의 규범과 일체감을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하느냐 하는 공동체 정치의 시련의 고비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