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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시대변화에 굼뜬 '구멍가게 창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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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 예고대로 창작과비평사(대표 백낙청)에 대한 비판적 사례연구를 해볼까 합니다. 우선 '신간의 첫 독자' 인 기자의 체감(體感) 하나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해보지요. 최근 얼마간 창비 쪽 신간 중 이렇다 할 만한 것이 매우 드물었다싶어 출판사에 확인해봤습니다.

요청한 자료를 살펴 보니 지난해 인문사회 서적으로 창비는 모두 9종을 펴냈고, 99년에도 그랬다는 겁니다. 이런 빈약하기 짝이 없는 출판 활동은 '당대' '이후' '삼인' 등 신생사들의 수준을 밑도는 것입니다.

물론 물량의 과다가 잣대일 순 없습니다. 1~2년새 창비에서 펴낸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E 톰슨), 〈이행의 시대〉(I월러스틴) 등은 훌륭한 완성도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이 사회에 필요한 지적.사회적 논의에서 중심축 역할을 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란 것이지요. 백교수의 단골용어 대로 적막강산 우리사회의 표류란 다름 아닌 '구멍가게 창비' 의 위축 탓일 수도 있는 겁니다.

알고 보면 창비의 지난해 매출액 65억원의 구조 자체도 현저하게 취약합니다. 즉 지난 30여년간 창비에서 펴낸 단행본(9백12권)이 시장에서 살아 움직여준 결과이고, 특히 어린이 책이 효자노릇을 한 결과일 뿐이지요. 이런 분석은 향후 전망이 더욱 갑갑하다는 판단으로 이어집니다.

혹시 "특정 출판사의 경영에 왜 뜬금없이 끼어드느냐" 고 물으시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창비는 어떤 전형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즉 국내 출판사의 중요한 특징은 1970년대 이후 운동권의 대거 유입인데,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이런 출판운동에서 창비는 연구대상입니다. 30대 이상 성인세대 중 한때 창비에 지적(知的)성장의 젖줄을 대보지 않은 이도 드물겁니다.

문제는 이제 변화된 이 시대의 지형지물 속에서 '출판운동' 은 '출판기업' 시스템의 도입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 또 현재 창비의 굼뜬 시대적응은 국내 출판계가 갖는 구조적 취약점의 또 다른 전형으로 지적된다는 점입니다.

70년대 이후 단행본사의 투톱이었고, 비슷하면서 또 달랐던 창비와 민음사를 비교해 보는 것은 그래서 유효합니다. 민음사는 현재 비룡소(어린이책).황금가지(팬터지 등 대중소설).사이언스북스(자연과학서) 등 자회사를 거느리며 새 시장 개척에 성공했습니다. 매출액 3분의2 이상을 해내는 자회사들을 거느린 민음사는 묵직한 인문학서 출간도 제몫을 해내는 항모(航母)인 셈이죠.

물론 민음과 창비는 '박맹호 이후' '백낙청 이후' 를 준비해야 하는 공통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즉 경영 대물림뿐 만이 아니라 안정된 에디터의 시스템 확보와, 디지털적 기동성을 갖는 종합출판의 구조 선택을 말합니다.

두 회사의 마스터플랜은 아마도 국내 출판사들의 모델로 작용할 터인데, 아무튼 그 모델은 창업자 이후 곧바로 추락했거나 추락 중인 왕년의 명문(名門)들인 신구문화사.정음사.을유문화사.일조각의 전철을 밟을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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