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서 엿보이는 민족성

중앙일보

입력

전 세계 게이머들이 온라인 게임에 열광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온라인 게임이라고 하면 ‘리니지’나 ‘포트리스2’ 등을 쉽게 떠올리는데 이들은 국내에서만 서비스되는 ‘내수용’ 게임들이다.

반면 MS가 서비스하는 ‘파이터 에이스’와 같은 액션 게임이나 소니의 ‘에버퀘스트’, 오리진의 ‘울티마 온라인’, 블리자드의 ‘디아블로Ⅱ’와 같은 게임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들 게임은 미국·일본·중국·영국 등 인터넷을 이용하는 세계 각 국의 게이머들과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국적이 다양한 만큼 게임을 즐기는 모습만 보더라도 ‘어느 나라 사람이다’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이는 크다.

미국과 유럽의 게이머들은 대체로 게임을 ‘느긋하게’ 즐기는 편이다. 똑같은 전략 게임이라도 긴박한 속도감을 중요시하는 한국인들이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는 것과는 달리 이것저것 건물을 지으며 감상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와 같은 게임을 더 선호한다.

한국인들이 ‘맵 핵’이라는 반칙까지 써가며 승부에 집착하는 것과는 달리 게임을 하다가 스스로 안개로 가려져 있는 시야를 밝히며 ‘내가 지은 건물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느냐?’고 자랑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게임은 ‘적을 없애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취미 생활일 뿐이다.

‘국가 간의 감정’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도 다양하다. MS가 온라인으로 서비스하고 있는 게임인 파이터 에이스는 2차대전에 등장했던 쌍엽기를 이용한 독 파이터(Dog Fighter) 슈팅 게임이다.

전투기를 몰고 기관총으로 적을 격추시키는 간단한 게임으로 처음 멀티플레이를 개시했을 때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국가 간의 감정이 게임 세계에서 여과 없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게임 내에서 일본 국적을 가진 전투기들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한국 국적을 가진 전투기들이 그 원인. 여기에 동남아시아와 미국의 ‘애국자’들도 가세를 했다. 대부분이 게임을 통해서라도 ‘한을 풀어보자’라는 생각을 하는 게이머들이다. 결국 수적인 열세에 몰리게 된 일본 게이머들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수십 대의 ‘편대’를 이루어 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에 질세라 한국 게이머들과 외국 게이머들은 ‘합심’해서 더욱 더 큰 초대형 규모의 비행 편대를 이루어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선 영국이 집중공격 대상

유럽에서는 영국이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연합 세력’이 영국 전투기만 보면 격추를 해대는 통에 영국 게이머들의 불만이 게시판에 쌓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이 ‘넘치는 동포애’를 발휘하는 바람에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사건도 있다.

오리진이 서비스하고 있는 울티마 온라인은 말 그대로 온라인 RPG(롤플레잉)게임.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최대한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게임은 게이머가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Avatar)를 설정하여 게임 속에서 먹고, 자고, 싸우는 과정을 통해 레벨을 올리며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가는 게임이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브리타니아 대륙에는 세계 각국의 게이머들이 자신의 집을 지어 살아가고 있는데, 이 중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코리아 타운’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인들이 외국인에게 ‘몰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원인은 길드 간의 전쟁을 통해서였다.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게임 속에서 길드나 클랜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를 도와가며 활동하는데 울티마 온라인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국인 길드가 외국인 길드에 의해 몰살당한 것이다.

황당한 것은 전쟁이 발생한 원인이다. 게임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면 유령으로 변해 떠돌아다니게 되는데 어느 한국인 게이머가 유령으로 변한 채 길드를 찾아와 ‘외국인에게 죽음을 당했다’라는 이유로 복수를 호소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다.

이에 울컥한 한국 길드원 전원이 ‘누가 감히 한국인을 건드리냐’라는 말을 뇌까리며 자신보다 더 세력이 강대한 길드인데도 전쟁을 걸어 결국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끝난 후에 ‘유령’이 되어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처음 한국 길드에 복수를 의뢰한 그 한국인은 바로 ‘악질 범죄자’였다. 외국인 길드에 큰 죄를 짓고 도망다니다가 무턱대고 한국인 길드에 찾아와 ‘애국심’을 호소한 것이다. 결국 한국인 길드는 ‘강제 해산’ 명령을 받고 그 서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사이버 세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온라인 게임의 초기 서비스 시절에 발생했던 것들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이버 게임 세계에서조차도 뚜렷한 ‘국경’이 있다. 사이버 세계는 순수하게 ‘사이버’ 상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과 똑같이 사랑이 싹트고 범죄도 발생한다. 국가간의 분쟁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나라 망신’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온라인 게임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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