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갑 맞은 김광규시인 시선집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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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대에 대한 고민도 없이, 이상을 향한 열띤 토론도 없이 일상에 갇혀 자잘하게 살아가는 중년의 자화상을 담담하게 그린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로 한없이 우리를 부끄럽게한 시인 김광규(金光圭.사진)씨.

모나지 않은 시세계와 쉬운 언어로 조용히 시작활동을 펼친 김씨가 시력 26년에 회갑을 맞아 시선집 〈누군가를 위하여〉와 그의 시세계.삶과 인간을 조명한 〈김광규 깊이 읽기〉를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냈다.

1975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한 김씨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아니다 그렇지 않다〉.〈아니리〉.〈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등 7권의 시집을 펴냈다.

전기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88년 이전에 쓰여진 시를 모았다면 이번 시선집 〈누군가를 위하여〉에는 그 이후 쓰여진 시 70편을 모았다.

"가끔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가는/ 전나무숲 산책길을 가로질러/ 민달팽이 한 마리/ 기어간다/ 혼자서/ 가족도 없이/ 걸어잠글 창문이나/ 초인종 달린 대문은 물론/ 도대체 살면서 지켜야할 아무런/ 집도 없이/ 그리고 안으로 뛰어들어가거나/ 밖으로 걸어나올/ 다리도 없이/ 보이지 않는 운명이 퍼져가는 그런 속도로/ 민달팽이 한 마리/ 몸으로 기어간다/눈을 눕힌 채/ 생각도 없이/ 느릿느릿" ( '느릿느릿' 전문)

김씨가 발을 들여놓던 70년대 한국 시단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난해시들이 많이 씌어졌다. 그럴만한 깊이와 지성으로서 어쩔수 없이 어렵게 시가 씌어졌는가 하면 그럴 것도 없이 어렵게 써야만 시가 되는줄 아는 시들도 씌어졌다.

이런 풍토에서 김씨는 조선 보통 선비의 정신과 정서를 밑바탕에 깔고 독자와 정확하게 소통될 수 있는 '쉬운 시' . '일상시' 의 지평을 연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류나 속도에 휘말리지 않는 정직하고 느릿느릿한 시세계로 우리 일상의 의미를 돌려주며 김시인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시는 여전히 오랜 시간에 걸쳐 깊은 고심 끝에 느린 속도로 씌어지고, 천천히 읽히는 문학형식이다. 21세기에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무서운 속도에 염증난 많은 21세기인들이 천천히 되풀이하여 시를 읽고 제각기 깊은 생각에 잠길지도 모른다. 바로 그 느린 특성 때문에 우리의 시가 품위 있게 살아남기를 바란다."

김씨의 바람대로 정직하고 품위 있는 시들은 인간이 인간인한 계속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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