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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의 북 체제 비판 계기로 주체사상에 의구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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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호 04면

조용철 기자

이광백은 원광대 법대 학생회 홍보부 차장이 됐다. 학교에선 등록금, 학내 민주화 투쟁과 통일 청년 운동이 맹렬히 벌어지고 있었다. 3월 시작된 등록금 투쟁은 동맹 휴업으로 번졌다. 광백은 본관 점거대와 함께 거기서 3개월간 먹고 잤다.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익산 시내로의 진출도 시도했다. 처음에 화염병을 던질 땐 죄책감이 들었지만 나중엔 하루 수십 개씩도 던졌다.

옛 민혁당 산하 반미조직 팀장 이광백씨

동맹 휴업을 하고 고향에 갔다. TV에 학생 시위가 나오자 아버지가 욕을 했다. 광백은 “아버지 같은 기성세대의 잘못된 세계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대들었다. 아버지는 온순했던 아들의 변해버린 모습에 분노하며 따귀를 때렸다. 동생들도 대학에 가더니 그런 형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길로 집을 뛰쳐나오는데 어머니가 “앞장서지만 말라”며 애원했다.

선배들은 광백에게 의식화 교육을 시켰다.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노동자의 철학, 사람 되는 철학』 『역사적 유물론』 같은 걸 읽었다.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선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이른바 민족해방(NL) 계열이란 걸 알았다. 2학년이 된 그는 ‘동그라미’라는 지하조직에 들어갔다. 소조원은 많을 땐 6명, 적을 땐 3~4명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2~3시간씩 선배들이 지도했다. 선배들은 물었다. “왜 너희 부모는 등골이 휘어지게 일해도 가난한가”라고 물었다. 광백은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선배들은 잘해줬다. 등록금을 걱정하면 도와는 못 줘도 고민은 나눴다. 밥과 술도 종종 사줬다. 그들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같이 일하자”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혁명을 하려면 애정을 주고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품성론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어쨌든 광백은 그런 선배들에게 감동했다.

북한에 대한 거부감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선배가 “우리는 NL”이라고 했을 때 얼떨떨했다. 김일성ㆍ김정일 수령론도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했다. 그러나 곧 타협했다. ‘수령론은 문제지만 다른 것은 다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들은 북한을 잘 몰랐어요. 북한은 수령과 당, 대중이 일심단결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만든다는 정도로만 여겼죠. 수령론 아래 사회적 생명체로서 자아를 실현한다는 사회 생명체 이론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습이다.” 이씨의 회고다. 역사의 법칙을 알게 되니 미래가 보였고 신념도 생겼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신하겠다고 결심했다. 조직생활에 더 충실하기로 했다. 90년 10월 법대에서 NL그룹 2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이씨를 차기 법대 학생회장 후보로 내정했다.

법대 학생회장이던 91년, 정국은 뜨거워졌다. 명지대생 강경대, 성균관대생 김귀정 등의 학생들이 시위 도중 숨졌다. 전국적으로 분신 사태도 이어졌다. 이름하여 ‘열사정국’이었다. 더 많은 반독재 투쟁과 더 많은 화염병을 위해 학생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법대 학생회 내에서 혁신투쟁도 벌였다. 한 선배가 법대 학생회에서 바둑을 두는 걸 보고 후배들과 함께 몰려가 “생활혁신투쟁 기간이어서 죄송합니다”라며 바둑판에 불을 질렀다. 바둑판이 탄 재 위에다 ‘생활혁신투쟁’이라고 썼다. 당시 총학생회는 비주사 계열이 장악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법대 조직원들과 총학생회를 급습해 바둑판 같은 것을 다 꺼내 불태웠다. 학교 비품창고를 비우게 해 주사파 동아리 방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조직원은 20~3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헌신적이고 강철 같은 조직은 무적이었다. 원광대 총학생회를 장악했던 새벽파(NL계이지만 비주사파)는 물러났다.

법대 학생회장 이광백은 대중 활동가 조직인 동그라미의 책임자가 됐다. 그는 조직 이름을 ‘1995’로 바꿨다. 김일성이 “1995년은 통일의 원년”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조직의 기풍을 잡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조직원들의 용돈을 모두 거둬 필요에 따라 재분배했다. 공산주의식이었다. 조직 규율도 정했다. 학교 수업은 안 했지만 혁명 이론은 꾸준히 공부했다. 누구나 조직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연애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연애문제로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헤어지라고 종용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막노동 몇 회, 운동장 청소, 집중 교육 같은 징계도 하고 제명도 했다. “나 스스로를 수령님과 장군님의 전사로 여겼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었어요. 남한을 북한처럼 만들기 위해 지하 혁명조직에 몸담는다고 믿었습니다.” 옛 소련과 동구권 등 사회주의권이 붕괴해 놀랐지만 북한이 당당히 버티는 걸 보고 자부심을 느꼈다. 주체사상의 우수성이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북한의 요덕 수용소에 대해선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 알았어도 ‘반동분자 수용시설’이라고 받아들였을 겁니다. 6·25도 남조선 혁명이 중요하지 누가 침략하고 말고는 본질이 아니라고 여겼죠.”

92년 4월 말 민혁당 중앙위 산하 전북위원회 소속인 반미구국청년학생 동맹이 그에게 교육사업을 요청했다. 그는 민혁당 중앙위원 김영환으로부터 간접 지도를 받았다. 그는 민혁당 하부조직원으로 96년까지 교육팀장, 한총련 정책위원, 전북 한총련 정책실장을 했다.

지하 교육팀에서 그는 전북위원회 학생 사업 책임자의 지도를 받았다. 전주 시내 주공 아파트와 일반 주택에서 많으면 6~7명, 적으면 3명씩 살았다. 외부와는 단절해 민혁당 반미구국청년학생 동맹의 교육 자료를 만들었다. 김일성 우상화 영화를 복제해 대학에 뿌리고 김일성 회고록을 전파시켰다. 가끔 전북 지역 대학교에 은밀히 찾아가 주체사상을 교육했다. 청년 김일성의 사회주의 운동을 담은 ‘조선의 별’이나 ‘민족의 태양’ 복사판을 틀었다. 한여름에도 소리가 안 새게 문을 닫았다. 숨이 막히고 땀이 흐르고 몸이 뒤틀렸지만 “혁명위업을 지도하는 장군님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같은 교재를 지속적으로 대학교에 퍼뜨렸다. 생활비나 주거비는 조직 책임자가 주로 댔지만 모 신문 지국을 인수해 자금을 만들기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오후에 수금했다. 당시 조직 보고를 보니 당원 100명, 핵심 성원 400명, 행동파 3000명쯤이라고 돼 있었다.

94년 7월 김일성이 죽었다. 모두 불안해했다. 이씨도 “김일성 장군님이 없으니 혁명은 어떻게 하나, 그래도 김정일 장군님이 있으니 낫겠지”라며 마음을 달랬다. 김정일 정권이 들어선 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북한동포 돕기에 참여했다. 전세를 빼고 월급을 추렴해 지역별로 몇 천만원씩 모인 돈 7억원을 재야단체인 전국연합이 북한에 보냈다.

그러다 청천벽력 같은 ‘말’지 사건이 터졌다. 주사파의 전설인 ‘강철서신’의 주인공 김영환이 북한 체제를 비판한 것이다. 반미구국청년학생동맹 내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씨도 ‘북한의 주체사상으로 세계 혁명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김영환을 만났을 때 김은 이씨에게 “사실 89년부터 회의가 시작됐다. 91년 북에 다녀온 뒤 훨씬 강해졌다. 민혁당을 돌려세워야 할지 고민했지만 관성이 너무 셌다”고 고백했다.

95년엔 ‘북한 이탈’ 현상이 더 강해졌다. 한민전이 방송을 통해 “김영삼 정부 타도 투쟁을 하라”는 지침을 보냈다. 하지만 조직원들 사이에서 이걸 무조건 따르는 대신 토론을 하자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96년 8월 13일 연세대 사태는 루비콘 강이었다. 한총련은 연세대에서 제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강행했다. 3000여 명의 학생은 6일간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했다. 폭력이 난무했고 경찰은 8월 20일 강경진압을 강행했다. 이 사태를 놓고 내부 투쟁이 벌어졌다. 민혁당이 주축인 혁신계는 “운동이 고립된다”며 폭력을 비판했다. 그러나 주사파이지만 비민혁당계인 자주계는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다. 3개월간 지도부에서 논쟁이 지속되다 대학 총학생회장들로 구성된 비민혁당계(자주계) 의장단이 민혁당계 집행 간부단을 밀어냈다. 민혁당의 패배였다.

혁신파는 민혁당 경기동부그룹의 거점인 수원 경희대에서 모였다. 이광백도 참석했다. 프로그램 중엔 ‘한민전과 김정일의 지도노선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전북총련의 누군가가 “한민전의 지도노선은 부적절하다. 김정일이 전 세계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경인총련의 지도급 인사의 얼굴이 굳어지며 밖으로 나가 전화로 지도지침을 구했다. 내려온 지침은 “한총련 혁신을 전북과 같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김정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전북총련은 제거가 된 것이다. 전북총련은 한총련을 탈퇴하고 민혁당 전북위원회는 공개 해체를 결정했다. 전북지역 1000명의 활동가 중 일부가 희망공동체 전북연대를 만들었다. 21세기 진보운동이 목표였다.

이광백씨는 97년 4월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5월 1일자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제적됐다. 희망공동체 전북연대 교육팀과 전북도 전주시 예산을 감시하는 시민행동21에서 일했다. 2001년 상경해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 연구위원과 시대정신 계간지 편집장을 했다. 2006년 7월 자유조선방송 대표가 됐고 2012년 4월엔 자유조선방송ㆍ북한개혁방송ㆍ열린북한방송ㆍ자유북한방송 등 민간 4사의 연합체인 대북방송협회 회장이 됐다.

-주사파 활동을 접은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

"내가 몸담았던 민혁당 산하 조직이 없어졌다. 기존의 절대가치가 무너지면서 두려움이 컸다. 외부엔 안 알려졌지만 95년부터 운동권 내부적으론 북한의 실체를 보자, 새로운 노선을 모색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96년엔 김정일을 부인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민혁당은 이미 더 이상 운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해체를 결정했을 것이다. 내가 운동을 그만둔 것은 북한의 실체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진보고 여전히 세계 변화를 위해 혁명 중이다."

-당신은 극좌에서 극우로 진폭이 너무 크지 않나.

“95년부터 북한 민주화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98년까지 모색기였고 그 뒤 점차 본격화된 것이다. 대북 방송을 하는 것도 북한 주민의 의식을 바꾸고 이를 지렛대로 북한 민주화를 하기 위해서다.”

-민혁당에 속했던 과거를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모두가 과거를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공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공개하고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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