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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줄 이혜영의 힘!현실과 이상 사이,비틀린 욕망...온몸으로 되살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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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호 22면

헤다 가블러. 이 여자의 히스테리에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권위 있는 장군의 아름다운 딸로 태어나 주위의 칭송을 한몸에 받던 오만한 여인이 무려 6개월간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틀 뒤 자살해 버린 심리란 어떤 것이었을까? 배우 이혜영의 무대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헤다 가블러’는 19세기 사실주의 연극의 초석을 다진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1890년 작으로, 국내 프로무대에 처음 오른 작품이다. 1891년 뮌헨 호프테아터의 초연 리뷰에 가장 빈번히 등장한 단어가 ‘이해 불가능’이라는데, 120년 뒤의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등장 이전에 ‘히스테리’의 개념을 생생히 제시한 인간상이라는 데 이 고전의 존재이유가 있다.

연극 ‘헤다 가블러’, 5월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

헨리크 입센은 인간 심리에 질문을 던지는 사실주의 작품들로 지금도 전 세계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지만, 우리에겐 대표작 ‘인형의 집’ 정도로 알려져 있다. 헤다 가블러란 여인이 더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나 ‘인형의 집’이 자신의 정체성을 얻기 위해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집을 떠나는 ‘개인으로서의 여성’을 그려 20세기 초 여성해방운동에 촉진제가 됐고, 주인공 노라는 여권 신장의 대명사가 됐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헤다 또한 남편에게 종속되는 규범적 여성성을 거부하고 운명을 스스로 지배하기를 꿈꾼 자유로운 영혼의 독립적 여성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파멸로 메운 비극의 주인공이지만.

소극적인 공부벌레 남편과 지루한 신혼여행을 보내고 돌아온 헤다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부서질 듯 흔들린다. 이상적인 생활을 꿈꾸며 빚이라는 현실을 지고 마련한 대저택에서 남편의 성이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아버지의 성 ‘가블러’의 이상에 젖어 산다. 모든 일에 남편과 엮이기를 거부하는 그녀는 ‘죽을 정도로 지루해 하는 재주 하나만 가지고 태어났다’며 현실 자체를 권태로 못박는다.

과거에 방탕했지만 새 사람이 된 옛 애인 뢰브보르그가 남편과 교수직을 다툴 만큼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옛 친구를 뮤즈로 삼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은 이상과 현실 간의 위태로운 균형을 허물어 버린다. 권태와 품위로 포장돼 있던 오만은 파헤쳐지고, 가질 수 없다면 부서버리겠다는 욕망에 휩싸인다. ‘내 생애 단 한 번 누군가의 운명을 바꿔놓고 싶다’며 뢰브보르그의 ‘아름다운 비극’을 이상적으로 연출하려 하지만, 추잡한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자 미련 없이 삶이라는 현실을 버리고 존엄한 자아의 이상을 지켜낸다. ‘머리에 포도넝쿨을 두른’ 여신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는 장엄한 의식은 그녀가 꿈꾸던 아름다운 비극을 스스로 연출한 것.

무대 곳곳에는 헤다의 심리를 암시하는 요소들이 정교하게 배치됐다. 무대와 객석의 시선을 지배하는 근엄한 가블러 장군의 동상은 무게라곤 느껴지지 않는 경박한 남편의 아내로 살아가는 현실을 부정하고 독립된 존재로서 살기 원하는 헤다의 이상이 얼마나 견고한지 형상화한 것. 무대를 비추기도 하고, 뒷방을 보여주기도 하는 거울은 새로운 욕망을 꿈꾸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헤다의 이중적 자아를 입체적으로 비춘다. 원작에는 단순히 늙은 하녀지만 곱사등이에 벙어리로 설정된 하녀 베르타는 음산한 음악과 함께 갈등의 고비마다 섬뜩하게 등장하는 연출로 헤다의 뒤틀리고 억눌린 자아를 대변한다. 최후의 순간에 여러 개의 거울로 헤다를 비추고, 수백 개의 와인 잔이 부딪쳐 흔들리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의 인간의 심리, 그 깨지기 직전의 연약하고 변덕스러운 상태에 대한 은유다.

‘햄릿1999’ 이후 13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이혜영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객석을 사로잡았다. 50세의 나이를 의식할 수 없는 것은 신경질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오만한 개념으로서의 헤다 가블러 캐릭터를 만들어낸 덕분이다. 작품은 이혜영의 출연만으로도 대중성을 확보했지만 사실주의 고전을 원작에 충실하게 재현한 무대는 난해하다는 평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계급구조가 와해되던 과도기적 시대에 다양한 인물의 등장을 예감하며 창조해 낸 새로운 유형의 여성상이 내밀히 드러낸 히스테리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19세기 귀족 이야기’로 낯설어 할 것이 아니라 그저 한 불행한 여인이 자살에 이르는 요동치는 심리를 정교하게 펼쳐보인 그림으로 본다면 공감이 좀 쉬울 듯하다.

100자평
허순자(연극평론가, 서울예대 교수) 오랜만에 무대에 오른 이혜영은 헤다의 독특한 개성을 훼손하지 않고 단 한 순간의 리듬도 놓치지 않는 명징한 연기로 기대에 부응했다. 일반 관객들에게 어려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든 인상적인 카리스마였다. 남성들의 연기가 헤다와 조우를 이루지 못해 균형이 깨진 것은 아쉬움이지만, 늘 새로운 레퍼토리를 발굴하고 적합한 배우를 발탁해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명동예술극장의 성공적인 무대였다. ★★★★

김소연(연극평론가) 거대한 가블러 장군의 동상, 위압적인 높이에 문이 보이지 않는 두터운 회색의 벽. 이미 파멸을 새겨넣은 무대에서 조명, 음향, 움직임 등 순간 순간 심리적 공간을 그리고자 하는 공들인 연출에도 불구하고 이혜영의 ‘헤다’만이 살아 있다. 의도한 선택인가, 막다른 결과인가. 입센을 만나기 위해서는 다시 기다려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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