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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투자자들

중앙일보

입력

많은 주식 투자자들에게 한숨과 절망을 가져다준 2000년이 ‘다행스럽게도’ 마침내 지나갔다. 1995∼1999년의 활황세를 감안할 때 2000년은 시장분석가들이나 많은 투자자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한해였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지난해 3월까지 미국 증시는 ‘모두가 손바닥을 마주치면 뜻이 이뤄진다’고 믿는 팅커 벨(신뢰) 시장이었다. 아주 많은 투자자들이 주가상승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수많은 고가주들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준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고공비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자산이나 수익보다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주식투자의 문제점은 일단 신뢰가 깨지면 주가가 한없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난해 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 원인이야 어쨌든 인기주가 폭락하면서 여러 주가지수들도 함께 하락했다.

나스닥 지수는 사상 최대폭인 39% 하락했다. 86%나 상승했던 1999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다우 지수와 스탠더드 & 푸어스(S&P) 500 지수도 각각 1990년과 1994년 이후 처음으로 하락세로 돌아섰다. S&P의 10% 하락은 역사적으로 큰 것은 아니었지만 활황이 시작되기 5년 전인 1977년 이후 최대폭이었다. S&P의 총수익(가격변동분+배당)도 1974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연말 결산을 해보자. 나스닥 시장의 시가총액은 5조2천억 달러로 2000년을 시작해 6조7천억 달러에서 꼭지점을 이룬 후 3조6천억 달러로 해를 마감했다. 미국 증시의 거의 모든 종목을 포함하는 윌셔 5000지수는 12% 하락했다. 2조 달러 가까운 돈이 증발한 셈이다. 전체 종목에서 S&P 500을 제외한 윌셔 4500 지수는 15% 가량 하락했다. 그것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된 텔레컴과 인터넷 주식들이 S&P에는 없지만 윌셔 4500에는 다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많은 가치주 투자자들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나스닥이 최고조에 달하며 기술주 투자자들이 기세를 올리고 가치주 투자자들이 눈물짓던 지난해 3월 이후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됐다. 기술주는 폭락하고 가치주가 급등한 것이다. 가장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지난해 3월 10일 나스닥이 천장을 쳤을 때 빌 게이츠가 소유한 마이크로소프트 지분 가치는 워런 버핏이 갖고 있던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 지분 가치 보다 5백50억 달러 더 많았다. 그러나 연말에는 워런 버핏의 지분 평가액이 20억 달러 더 높아졌다. 무엇보다 마이크로소프트 주가가 57% 하락한 반면 버크셔 주가는 72% 상승했기 때문이다.

개미 투자자들이 시장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하지 않는 건전하고 침착한 투자자들이라는 환상은 지난해 깨지고 말았다. 3월과 4월 가치주 펀드와 S&P 500 지수 펀드에서 큰 돈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중 상당액이 기술주 펀드와 개별 기술주로 몰린 듯하다. 달리 말해 기술주의 ‘상투를 잡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9년 말의 주가상승과 마찬가지로 2000년의 나스닥 폭락도 ‘팅커 벨’ 요소로 촉발됐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가을 일단 주가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뮤추얼 펀드들은 10월의 회계결산에서 손실을 기록해 세금감면을 받기 위해 주식을 투매했다. 매도는 매도를 낳았다. 펀드의 매도가 그치자 많은 개인 투자자, 헤지 펀드, 연금 펀드들도 그 뒤를 따랐다. 모두가 인기주를 갖고 싶어했던 1999년에는 어리석은 믿음이 주가를 끌어올렸다. 2000년에는 또다른 믿음 때문에 주가가 떨어졌다.

나스닥 주가가 어쩌면 그렇게 빨리 급락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나스닥이 급등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나스닥은 4천7백여 종목이 등록돼 있지만 가중평균 지수다. 시가총액이 2천억 달러인 한 종목이 시가총액 10억 달러인 종목 2백 개와 동등하게 간주된다. 시스코·마이크로소프트·인텔·오라클·선 마이크로시스템스·암젠·퀄컴 등 불과 7개 종목이 지수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컴퓨터 관련 주식은 나스닥의 49%, 텔레컴 주식은 15%를 차지한다. 지난해의 경우처럼 그런 종목들이 폐렴에 걸리면 나스닥은 중환자실에 실려간다.

2001년 증시는 어떻게 전개될까.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전망이 어둡다는 사실은 오히려 다소 안도감을 준다. ‘팅커 벨’ 장세가 끝났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성숙한 투자가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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