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사랑 엿본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입력

애타게 그를 불렀다. 시선이 자꾸 빗나갔다(물론 무시당한 면도 있지만) . 계절이 바뀔 즈음, 그를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폐쇄회로 장치에 남은 그녀의 자국과 순간 순간 스쳐간 기억들. 비로소 그가 "요쿠르트는 바닥을 이로 뚫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며 손을 내민다.

그녀는 언젠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자였음에도 왜 그는 엉뚱한 곳에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박흥식 감독.13일 개봉) 고 외쳤던 걸까.

이탈리아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아마코드' 에 등장하는 한 미치광이의 대사에서 제목을 빌려온 이 영화는 여느 시장에서 뽑아 스크린으로 옮기면 저렇겠구나 싶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남녀의 사랑을 다룬 멜로 드라마다.

"진국이다" 는 평을 들으면서도 여자 친구 하나 없는 은행원 봉수(설경구) 와 칠판 지우개를 털며 "먹고 살기 힘들다" 고 푸념하는 보습학원 강사 원주(전도연) . 어느날 범생이 봉수는 무단 결근을 감행한다.

전날 갑자기 멈춰버린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모두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데 자신에겐 그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는 것이 이유다.

그러나 정작 봉수는 알지 못한다. 그에겐 일상이지만, 반경 1백m 안에 출근하다가 혹은 일을 하다가 부딪치는 한 여자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아내가...' 가 데뷔작인 박감독은 일상의 섬세함을 포착하는데 비상한 재주를 보인다.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지 그 느낌을 잘 담아낸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와 시인과 우체부의 소박한 우정을 잔잔하게 그린 마이클 랫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 를 좋아한다는 박감독은 자신의 취향대로 철저히 일상과 일상을 이어간다.

버스안 장면에서 학원이나 은행으로 옮겼다가 다시 분식집이나 방안, 그리고 간혹 아이들이 남몰래 짖궂은 짓을 하는 옥상이나 민방위 훈련 중인 길거리 장면이 약간 특별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 사이 사이의 디테일이 영화 속 행간을 읽는 특별한 맛을 선사한다.

예컨대 병원에서 남편이 소변 보는 일을 돕는 아내나 빨랫줄에 거꾸로 널린 큰 우산과 작은 우산을 통해 둘이 함께 한다는 것이 지니는 안정성을 슬쩍 일깨운다.

그리고 학원강사 원주의 일상이 묻은 목캔디나 봉수에게 사달라고 조르는 배가 사랑의 정도를 관객에게 알려주는 도구로 쓰인다.

감독은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시나리오 상의 순서대로 촬영했고 한 장면도 세트를 활용하지 않았다.

설경구의 연기 또한 징그러울 정도로 현실에 닿아있다. 연기를 안 한다 싶을 정도로 능청을 떨며 수시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극중에서 마술 솜씨까지 선보이며 기염을 토한다.

반면 전도연은 평범한 학원강사 원주 역을 맡은 탓에 '해피엔드' '내마음의 풍금' 에서 보인 개성을 드러내진 못하지만 그 대신 작품에 묻힐 줄도 아는 성숙함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웃집 총각 처녀의 일상을 관조하는 느낌을 주는 탓에 극적 긴장감을 줄 만한 굴곡이 없어 자극을 요구하는 젊은 관객들에겐 그들의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질 듯하다.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길 구조는 있으나 이렇다할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아무튼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 '해리와 샐리를 만났을 때' 가 미적미적하는 연인들의 서구적 연애 방식을 빼어나게 그려냈다면 '나도 아내가...'도 한국적인 남녀의 만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로 기억할 만하다.

-Note-

'단조로운 일상에서 꺼낸 보석같은 기쁨' '별다를 건 없지만 잔잔한 감흥을 일으키는 우리 얘기''좀 지루하잖냐,코드가 잘 않맞아'.

세 가지 느낌 중 어떤 결론에 도달할 지.당신이 지금 사랑에 조금이라도 연루돼 있다면 후한 쪽으로 기울지 않을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