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다저스 역사 (2) - 브루클린의 '황금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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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최강자 브루클린 브라이드그룸스가(당시 다저스의 애칭)가 내셔널리그로 활동무대를 옮긴 것은 1890년의 일이었다.

신입생의 전력은 막강했다. 다른 내셔널리그 팀들이 '플레이어스 리그'의 출범으로 인한 주전선수들의 유출을 막지 못한 반면, 다저스는 대부분의 선수들을 지켜냈기 때문. 그 해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111년 역사'를 개막하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부진했던 다저스가 다시 활력을 되찾은 것은 찰스 에버츠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구단주 해리 반 더 호스트간의 밀약이 이뤄진 1899년이었다. 에버츠는 반 더 호스트에게 다저스 지분의 30%를 허락한 대가로 오리올스의 네드 헨런 감독과 핵심 선수들을 받았다.

1899년, 1900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도 윌리 킬러, 허기 제닝스, 조 켈리, 짐 허그스, 덕 맥제임스의 가세 덕분이었다. 그러나 다저스는 그후 40년동안 리그 우승을 두 번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침체기를 보낸다.

다저스가 명문팀으로서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것은 1938년 래리 맥파일이 부회장에 취임하면서였다. 맥파일은 짧은 5년의 재임기간동안 전력강화에 매진함은 물론 다저스를 재정적으로 튼튼하고 인기있는 구단으로 만들었다.

맥파일의 뒤를 이은 브랜치 리키는 '황금시대'의 막을 연 주인공이었다. 최초의 팜 시스템 개발자로도 유명한 리키는 전술한바 대로 1947년 인종의 벽을 허물었고, 온화한 버트 쇼튼을 감독에 임명했다.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정확히 10년동안 다저스는 리그 우승 6회를 기록하면서 내셔널리그 최고의 팀으로 군림했다. 가장 나빴던 해의 성적은 3위.

재키 로빈슨(2루수)은 피 위 리즈(유격수)와 함께 최강의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으며, 1948년에는 전설적인 명포수 로이 캄파넬라가 합세했다. 1949년에는 외야수 듀크 스나이더가 주전으로 도약, 길 허지스(1루수)-캄파넬라의 파워라인에 무게를 더했다.

마운드의 주인공은 돈 뉴컴이었다. 1949년 신인으로서 팀내 최다승인 17승을 거두며 혜성처럼 등장한 뉴컴은 부상에 허덕였던 1954년을 제외하면, 이 기간동안 매년 평균 20승 이상을 올렸다.

황금시대의 최절정은 1953년이었다. 이때 거둔 105승은 아직도 다저스의 최다승 기록이다. 특히 타선이 돋보였던 다저스는 타율, 출루율, 장타율, 득점, 홈런, 총루타, 도루 등 공격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오점은 있었다. 6번 도전했던 월드시리즈에서 무려 5번이나 고배를 마셨던 것. 공교롭게도 상대는 모두 동향팀 뉴욕 양키스였다.

1941년 포함,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에게 5전전패를 당했던 다저스의 복수는 1955년에 이루어졌다. 첫 두 경기에서 2연패를 당하며 악몽을 되풀이하는 듯 했던 다저스는 3, 7차전에서 각각 2실점 완투승, 완봉승을 따낸 자니 포드리스의 대활약으로 극적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포드리스는 처음 제정된 월드시리즈 MVP의 영광도 안았다.

양키스 돈 라센에게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의 수모를 당한 1956년, 구단주 월터 오말리는 충격적인 뉴스를 발표했다. 팀을 로스엔젤리스로 옮기겠다는 것. 오말리의 폭탄선언과 함께 다저스의 브루클린 시대는 그렇게 끝이 났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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