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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금융 이정도 돼야] 1. 합병, 생존을 위한 선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00년 12월 중순, 미국 뉴욕의 맨해튼 파크애버뉴 47번가와 48번가 사이에 자리잡은 체이스은행 본사.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흥청거리기 시작한 거리표정과는 대조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3개월 전 발표된 JP모건과의 합병계획에 따라 통합작업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 특히 30층 기업금융부서는 짐을 싸느라 어수선했다. 이 부서원 전원이 JP모건으로 옮기도록 발령을 받은 것.

"우리나 JP모건이나 기업금융 관련 인력이 각각 1만6천명이나 됩니다. 합병으로 당장 5천명 정도는 회사를 떠나야 할 걸로 보입니다. " 취재팀을 안내한 앤드루 터커 이사의 설명이다.

"50대 50과 같은 룰은 없습니다. 여러 금융기관들이 그룹을 이뤄 돈을 빌려주는 신디케이트론 분야는 체이스가 강하니까 우리측이 주축이 되고, 인수.합병(M&A)분야는 JP모건쪽이 주도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같은 통합에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 합병에 이골이 난 듯한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이스는 1990년대 들어서만 두차례 초대형 합병을 경험했다. 두번 다 당시로선 미국 최대의 합병이었다.

첫째는 91년 케미컬뱅크와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트러스트의 합병. 당시는 미국 은행의 시련기였다. 뉴욕의 상징 가운데 하나였던 록펠러센터 빌딩이 일본 미쓰비시 부동산에 넘어갈 정도로 미국 기업들이 어려웠다. 은행들은 눈더미처럼 쌓이는 부실채권에 파묻힐 정도였다.

"살아 남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체이스의 신용등급이 투자적격으로 분류되는 마지노선인 BBB까지 추락한 것은 물론 은행간 자금거래마저 끊길 위기에 처했습니다. 합병을 통한 비용절감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 터크 이사는 당시 합병의 절박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두 은행의 합병으로 탄생한 케미컬은행은 뉴욕에서만 80개 지점을 폐쇄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96년 케미컬은행은 체이스 맨해튼 은행과 또 한번 극적인 합병 드라마를 연출했다. 1만2천여명의 감원과 1백여개 점포의 폐쇄조치가 뒤따랐다.

구조조정이 효과를 내면서 91년 3~4달러까지 떨어졌던 주가는 90년대 후반 30달러대로 회복됐다.

"두차례 합병으로 체이스는 미국 3대 은행 대열에 끼었지만 여전히 약점이 있었습니다. 유럽시장 영업과 M&A 등 투자은행업무의 보강이 필요했죠. JP모건은 그런 면에서 환상의 파트너였습니다. " 한국에서 근무하다 1년6개월 전 미국 본사로 발령받은 이승연 이사의 설명이다.

뉴욕을 휘몰아친 합병 바람은 유럽도 비켜가지 않았다. 99년 초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파리국립은행(BNP).파리바은행.소시에테제네랄(SG)의 3각 합병 시도가 좋은 예다.

프랑스 2위 은행인 SG가 파리바 인수를 발표하자 BNP는 한술 더 떠서 두 은행을 한꺼번에 인수하겠다고 선언한 것.

결국 99년 8월 BNP는 파리바만을 인수하는데 그쳤지만 이를 통해 BNP파리바는 세계 10대 은행에 진입하게 됐다.

"BNP는 고객들에게 제공할 다양한 금융상품이 부족했고 파리바는 고객수가 적었지만 두 은행의 합병으로 서로 약점을 보완했습니다. "

18세기 나폴레옹과 조세핀이 결혼한 장소로도 유명한 파리 앙텡 거리의 옛 파리바은행 본점. 취재팀을 맞은 아시아지역담당 매니저 마크 하팡스와 홍보담당 앙리 드클리송은 합병의 시너지 효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취재팀이 도버해협을 건넌 2000년 12월 8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1면을 장식한 기사는 영국 3위의 로이즈TSB가 5위의 애비내셔널은행을 대상으로 적대적 M&A에 나섰다는 기사였다.

주택금융의 강자인 애비내셔널은 이미 한달 전 스코틀랜드은행과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던터라 로이즈의 이같은 선언은 런던판 '3각 합병' 으로 관심을 모았다.

개인금융의 애비내셔널과 기업금융의 스코틀랜드은행에 주택금융의 로이즈까지 합세하면 소매금융의 최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기 때문.

명탐정 셜록 홈스의 활동무대인 런던 베이커가의 애비내셔널 본점에서 만난 시드 해너 마케팅담당 부장은 "어떤 일(합병과 관련한)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우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고 자신감을 보였다.

비슷한 시각 도쿄에선 다이이치간교(第一勸業).후지(富土).니혼고교(日本興業)은행의 통합작업이 한창이었다. 99년 8월 세 은행이 세계 최대은행을 목표로 미즈호금융그룹(MHFG)으로 통합키로 한데 따른 것.

"부실채권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그래서 대형화를 위한 합병에 노조도 박수를 쳤지요. " 익명을 요구한 미즈호그룹 관계자는 이 고비만 넘기면 일본 은행들이 80년대의 전성기를 다시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특별취재팀>
정선구.정경민.나현철.김원배.서경호 기자
김유경 증권거래소 조사국제부장
지동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임기영 한국외국어대 교수
박희철 외환은행경제연구소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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