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리뷰] 성자의 지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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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간다.

구부러졌다가는 펴지고 낡음이 다하면 새로워지는 자연의 이치를 알면서도, 숫자놀음에 일희일비하는 인간의 운명은 화(禍) 와 복(福) 이 서로 기대어 있으면서 돌고 도는 이치에는 막상 둔감하다.

노자(老子) 의 한 구절이 새롭게 음미되는 세밑, 중앙일보 '행복한 책읽기' 는 송년 리뷰로 소설가 문순태의 전기소설 '성자의 지팡이' 를 다룬다.
일제 이후 1960년대까지 나눔의 삶을 살았던 최흥종 목사의 삶이 실물 크기로 재현되고 있다.

불우한 가족사로 인한 청년기의 방황, 그리고 고단했던 근현대사의 복판에서 나눔과 사랑의 삶을 보여줬던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목사의 삶을 송년 리뷰로 반추해 보는 것은 각별한 이유가 있다.

오방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큰 이름' 이었으나, 오랫동안 사회적 익명상태로 남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일대기 형태로 재현한 소설가 문순태의 저작 '성자의 지팡이' 는 오방의 애제자 이영생(전 YMCA총무) 씨의 구술을 중심으로 했다.

정확하게는 실명(實名) 전기소설. 이 책은 분명 우리 앞에 왔었던 이의 삶을 실물 크기로 그려내는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

◇ 진보보다 더 실천적인 보수〓이념으로 또는 감정으로 갈라진 마음을 감싸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더욱 값지다.

보수 기독교신학에 생각의 뿌리를 두면서도 진보적 이론가보다 더한 나눔의 실천으로 일관한 그의 삶은 20세기 초중반 정치적 리더들과 교계 지도자들의 높은 이름과 또 다른 변별성을 갖는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하는 것이 천리요 운명이다.
우주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에서 생로병사 행왕(行往) 좌와(坐臥) 환몽중(幻夢中) 에 초로같이 춘몽같이 시들어지는 것이 인생인데 어찌하여 죄악 중에 멸망의 길로만 가는가.

" 오방의 유언 첫 구절이다.
24세 때 처음 기독교를 접한 그는 무아(無我) 의 보살행을 실천했음이 신간에서 드러난다.
그런 설득력은 전기소설에서 묘사되는 그의 삶 자체가 주는 무게에 힘 입는다.

'사일(死日) 이 곧 생일' 이라던 그는 늘 "한 사람이라도 굶는 자가 있다면 어찌 내가 먹을 수 있겠느냐" 고 말했다.

저자 문순태는 자신이 고등학생이었던 50년대 말, 오방을 먼발치서 실제로 보고 '간디의 모습과 흡사했다' 고 회고한다.

66년 5월 광주공원에서 최목사의 사회장이 치러질 때 수많은 나병환자들과 걸인들이 "아버지, 우리는 어쩌라고 이렇게 가십니까" 하며 울부짓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저자는 술회하고 있다.

◇ 시대의 상징어 '문둥이' 〓오방은 나병환자와 걸인들의 아버지였다.
그의 헌신적 보살핌으로 말미암아 그가 살았던 광주를 포함하여 전라도는 문둥이와 걸인들의 고향이 된다.

소록도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과정, 함경도에서 태어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전라도를 찾아가는 이유가 최목사의 일생을 통해 비로소 이해된다.
문둥병은 그 시절 망국의 현실과 조응되어 시대의 단면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통했다.

오방 최흥종의 아호 오방(五放) 이란 다섯 가지의 얽매湛막觀壙?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가사에 방만(放漫) , 둘째 사회에 방일(放逸) , 셋째 경제에 방종(放縱) , 넷째 정치에 방기(放棄) , 다섯째 종교에 방랑(放浪) 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는 본래부터 거룩한 위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외려 반대다.
젊은 시절 오방은 뒷골목의 '주먹' 이었다.

주먹에서 목사로의 극적인 변신(박스 기사) 도 놀랍지만, 기독교에 귀의한 후 이름도 영종(泳琮) 에서 흥종(興琮) 으로 바꾼 오방은 혈육과 사회 모든 종파를 넘어서 다섯 가지의 신조를 지키며 살았다.

나눔의 삶을 실천한다고 집안일에 무심한 그에게 반발하여 그의 장남이 한때 자신을 오취(五取) 라 불렀다.

아버지가 버린 다섯 가지를 아들인 자신이 다시 갖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의 삶을 이해한 장남이 우방(又放) 이라고 이름을 고친다는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그렇다면 오방이 살아온다면 그 나눔의 손길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오늘의 '문둥이' 를 부둥켜 안을 또 다른 우방(又放) 은 누구인가.
아직도 스산한 시대, 오방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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