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사이트는 무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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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터넷의 익명성이나 중독성이 죽음을 부른 것일까? 기사들을 잠시 의심해 본다. 네티즌은 그렇게 우매한 존재들인가? 이는 폭력적인 장면을 많이 보면 사람들이 전부 길거리에서 싸움질이나 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유치한 논리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마당에 우울한 소식을 들으면 더 우울해진다. 최근 인터넷 자살 사이트와 관련된 기사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함께 동반 자살함으로써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객관적 사실 보도에서도 죽음이 주는 쓸쓸한 감상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절박한 상황에 대한 상상으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인터넷 자살 사이트가 죽음을 불렀으며, 인터넷이 촉탁살인까지 유도하는 매체가 되었고, 그러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사이버 중독자들이었다는 기사 속 서술들이다.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허울을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가진 매력과 가능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으리라.

사이버 중독자로 몰아붙이는 언론의 독단

그러나 마냥 우울해할 수만은 없었다. 미련 때문에. 정말 인터넷이 가진 익명성이나 중독을 유발하는 속성들이 죽음을 부른 것일까? 기사들을 잠시 의심해 본다. 만일 그렇다면, 네티즌들은 매우 우매한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는 마치 폭력적인 장면을 많이 보면, 사람들이 전부 길거리에서 싸움질이나 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유치한 논리다.

우리에게 매체란 무엇인가? 매체는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가?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많은 매체들이 존재하는 와중에 그 매체의 홍수 속에서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서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사실 인터넷 문화에 대한 자성과 발전 방향 모색 또한 네티즌들 사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외부에서 동떨어진 입장과 논리로 그러한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은, 가끔 일침을 가하는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뭘 모르는 소리라는 반 비판에 휩싸이기 일쑤다.

즉, 자살이라는 개인적 현상과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단편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독단이라는 누명을 벗기 어렵다. 게다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살이 기술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하니, 인터넷으로 얻은 정보가 자살을 가능케 했다는 논리도 말이 안된다. 이 사건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고 있는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가진 일종의 리얼리티는 인터넷 없이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자살은 어떨까? 즉,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 그리고 삶을 영위하거나 버텨나가기 힘들게 만드는 조건과 관련지어 그 영향 속에서 개인들이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자살을 선택한 자들을 사이버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이버 중독자로 몰아붙이는 언론이 그 죄를 벗기 더욱 어려워진다. 이번 사건을 다루는 동안에, 그들이 내내 초점을 두고 있던 것처럼 인터넷 자살 사이트만 들여다봐 가지고서는 도저히 그러한 사회적 의미를 찾아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좀 더 통시적으로 자살 증가와 그 원인, 자살 연령 및 계층을 파악했어야 한다.

죽음 직전까지 구원 기다리는 자살 시도자

일러스트/DS203게다가 자살 사이트라는 곳에 그들이 가 보기나 한 것일까. 약간은 의심스럽기도 하다. 현재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자살 사이트의 다수는 폐쇄되어 있는 상태인 까닭에, 커뮤니티 사이트 내에 있는 동호회만 둘러볼 수밖에 없었지만, 이 동호회들에서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는 인상은 좀처럼 받기 어렵다.

오히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외롭거나 괴로운 사연들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자리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동호회에서는 이번 사건을 두고 “정말 (자살을)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또한 이번 사건 때문에 자신들이 유일한 안식처로 삼던 동호회가 폐쇄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소수가 모여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고 혼자가 아님에 위안을 얻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들 사이트가 여타의 언더 문화 동호회와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넋두리나 위로, 더불어 유쾌함이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프로이트와 영화를 본다면’에서 저자 김상준(정신과 의사)은 영화 ‘여인의 향기’를 통해 자살에 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그 중 한 가지 오해는 진짜 자살을 할 사람은 남에게 그런 마음을 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주위에 미리 자살할 의향을 알리거나 암시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프랭크와 찰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형을 만나고 여자와 즐길 것이다. 그 다음엔 호텔의 멋진 침대에 누워 머리에 총을 쏘지.”

“자살을 할 거라고 했나요?”

“아니, 머리에 총을 쏜다고 했어.”

자살 사이트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위험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두 번째 오해를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번째 오해는,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살에 대한 확고한 결단을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죽음 직전까지 구원을 바라고 있으며, 끊임없이 갈등 속에 있다고 한다. 영화 속의 프랭크 역시 그러한 구원을 바란다. 프랭크는 찰리에게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하라고 하며, 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탱고를 잘 추고 페라리를 잘 몬다.”

그리고 프랭크는 그 이유에 기대어 자살을 그만두기로 한다.

자살 사이트에서의 비관적인 대화는 구원을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수 있으며, 가족이나 친구들과 그러한 심정을 나눈다면 구원의 길이 조금 더 쉬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답답함만 느끼는 이들이 자살 사이트를 통해 약간은 어렵지만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빛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인터넷 따위의 매체가 부추긴다고 해서 잘 살던 사람이 죽고 싶을 리 없다. 자살 사이트를 무작정 폐쇄하려는 시도, 혹은 여론조성은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끔 하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태도이며, 동시에 그들의 마지막 소통 공간일지 모르는 안식처를 파괴해 버리려는 시도이다. 이를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이 밉다고 해서 그것을 외면하고 파괴하는 또 다른 자기 파괴 행위라고 해석한다면 무리일까?

‘한 번도 죽어보지 못했다. 그것이 억울하다.’

어느 자살 관련 동호회 이름이다. 사실은, 자살 사이트 사람들은 지금 바로 언론과 경찰의 횡포에 “한 번도 죽어보지 못했다. 그것이 억울하다”고 외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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