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청소년 롤모델의 진로 조언 ⑥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주연배우 임규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6면

임규진씨는 “뮤지컬 배우들이 해외무대에 서기 위해 영어는 필수 조건”이라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Hear how the wind begins to whisper(들어보세요.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를).” 노래 ‘Soon It’s Gonna Rain’이 청아한 목소리를 타고 미국 브로드웨이에 울려 퍼졌다. 노래를 부른 주인공은 한국인 뮤지컬 배우 임규진(23·여)씨다. 미국에 간 지 3년 만인 2011년 뮤지컬 ‘판타스틱스(The Fantasticks)’의 주인공을 따내 열연했다. 판타스틱스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티브를 따온 성장 뮤지컬이다. 잠시 휴가차 방한한 그를 지난달 27일 경기도 분당에서 만나 낯선 환경을 딛고 브로드웨이에 우뚝 선 그의 해외 무대 개척기를 들어봤다.

-순수 국내파인데 어떻게 해외 오디션에 붙을 수 있었나요.

 “오디션에서 제 긍정적인 성격을 많이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임규진은 굉장히 활동적이고 긍정적인 아이구나’라고 느낄 수 있게요. 발걸음부터 당차게 들어간 후 심사위원과 눈을 마주치고 활짝 웃었어요. 심사위원이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듣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행동했죠. 능력이 출중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기보다 ‘나는 10대 소녀 감성에 맞는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다’를 강조했어요. 대부분의 지원자가 심사위원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는데 전 제가 가장 잘하는 걸 했어요. 뮤지컬 ‘110 In The Shade’의 여주인공 리지가 부른 ‘is it really me’를 부르거나 ‘게이샤의 추억’ 사유리의 부채춤을 추면서 말이죠. 심사위원들도 동양 여학생의 그런 자신감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언어문제와 차별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뮤지컬이 정말로 하고 싶었기에 무조건 발음을 고쳐야 했어요. 외국 사람들은 상대방이 잘못된 발음을 해도 예의상 ‘괜찮아’라며 틀린 발음을 지적해주지 않아요. 모음만 공부하는 책을 사서 발음을 하나하나 고쳤어요. 예를 들어 오늘은 ‘아’와 ‘야’ 발음을 고쳐야겠다고 정하면 같은 발음만 수백 번씩 연습했어요. 보이스&딕션용(발음과 단어에 초점을 맞춘 책) 셰익스피어 책을 구입해 따라 하면서 연기 연습을 했고요. 대사를 외울 때는 한 문장씩 또박또박 완벽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했어요. 교사에게 눈을 감으라고 한 뒤 제 발음이 완벽한지 확인하는 작업도 수차례 거쳤죠. 아메리칸 뮤지컬 드라마틱 아카데미(AMDA)를 다닐 2009년 즈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미국 어디에서 태어났느냐’고 물을 정도로 실력이 향상됐어요. 동양인 최초로 3학기 연속 최고연기·노래상도 받았죠. 배우에게 발음은 굉장히 중요해요. 아시아계 배우들의 역할이 동양인으로 한정되는 이유는 언어 때문이에요. 많은 사람이 ‘동양인은 안 돼’라고 생각하고 포기해요. 해보지도 않고 하는 소리예요. 노력하면 언어와 배역의 장벽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요.”

-동양인으로서 받는 차별이나 실패는 없었나요.

 “미국의 유명 예술학교인 파이브 타운스 칼리지(Five Towns College·FTC) 뮤지컬과를 다니면서 한국 학생은 저 혼자였어요. 매 학기 공연을 하는데 혼자 동양인이라 할 수 있는 대본과 역할에 제한이 많았죠. 그러다 ‘유린타운(Urine town)‘이라는 공연에서 여주인공의 언더스터디(주인공이 아프면 대신하는 역할)를 맡게 됐는데 정말로 여주인공이 아픈 사태가 발생했어요. 주위 배우들이 제가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말했죠. 그런데 다들 ‘주인공이 동양인이네’라며 한마디씩 농담을 하는 거예요. 여주인공의 아빠 역할을 맡은 배우조차 ‘내 딸은 아시안’이라면서요. 감독은 한마디 상의 없이 리허설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던 백인 배우를 저 대신 세웠어요. 커다란 실망과 충격을 받았죠. 영어에 문제가 있으니까 다른 배우들도 저랑 하는 공연을 꺼렸어요. 연기에만 신경 써도 모자란데 상대 배우가 말을 더듬으니 답답했던 거죠. 잘못된 발음을 하니까 혼동도 많았어요. 악보(music sheet)를 말했는데 상대방은 shit(대변)으로 듣곤 했으니까요.”

- 고3때 뮤지컬 배우 준비를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어렸을 적 꿈이 발레리나였어요. 네 살 때 발레를 시작했는데 14세에 부상을 당했어요. 토슈즈를 못 신을 정도였죠. 발레의 꿈을 접고 평범한 여고생으로 돌아갔지만 무대가 없는 생활을 하려니 너무 우울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포기할 수 없었고, 고3이 돼서야 ‘뮤지컬 배우’로 진로를 결정했죠. 뮤지컬 본 토인 브로드웨이에 서는 것이 꿈이었기에 외국 대학 진학을 모색했어요. 한국은 학벌을 중시하지만 해외 대학은 지원자의 가능성을 보거든요. FTC에 오디션을 보고 합격했어요. 이후 AMDA로 진학했고 뮤지컬 ‘판타스틱스’와 ‘디즈니인챈티드!’의 주인공으로 설 수 있었습니다.”

-해외 무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조언해주세요.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학생에게 연락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저도 언니처럼 되고 싶은데, 언니를 따라 FTC에 가면 될까요?’란 질문이었죠. 미국에는 정말 좋은 학교가 많아요. 예일대, 줄리아드대를 비롯해 배우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전문학교들이 무궁무진하죠. 노래 교육에 집중하는 학교, 연기를 잘 가르치는 학교가 다르기 때문에 본인에게 맞는 학교를 골랐으면 해요. 무엇보다 해외 무대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반드시 영어 공부를 하세요. 언어가 되지 않으면 좋은 교육을 받아도 뛰어난 배우로 성장할 수 없어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영어로 된 연극대본을 자주 읽고 미국 드라마도 많이 보세요. 안 되는 건 없어요. 노력하면 이룰 수 있어요.”

글=김슬기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뮤지컬 배우 임규진은

1989년생. 분당 대진고 졸업. AMDA 수학 후 2011년 미국 ‘브로드웨이 라이징 스타’ 19인에 선정, 뮤지컬 ‘디즈인챈티드!(Disenchanted!)’ 뮬란 역, 뮤지컬 ‘판타스틱스’ 주인공 루이자 역을 맡았다. 올해는 공연 ‘디즈니 크루즈 라인 드림’에서 자스민 공주·포카혼타스 역으로 분할 예정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