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수길 칼럼

이제 다시 일자리를 이야기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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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수길
주필

어설픈 공약을 내놓은 채 공천 갈등 속에 총선을 치르고 나서 각 정당은 요즘 자기들끼리의 계파·권력 다툼에 빠져 있다. 딱한 것은, 유권자들은 이미 이념·계파를 떠나 구체적 희망·비전을 갈구한 지 오래됐다는 사실이다.

 올 연말 대선에서의 표심은 무엇을 원할까. 많은 것들 중에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일자리다.

 양극화·복지·고령화·저출산·가계대출 등의 문제 해법을 따져 들어가 보면 결국 좋은 일자리라고 다들 말한다. 일자리는 모든 세대에 공통된 이슈이기도 하다. 각 당도 이를 잘 안다. 4·11 총선 공약에서 민주당은 1순위로, 새누리당은 2순위로 일자리를 내걸었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 지금, 보이고 들리느니 온통 신물 나는 계파·권력 다툼이고 줄서기지 일자리 등 손에 잡히고 미래가 걸려 있는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해법 모색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선에 나서려면 미리미리 내공을 쌓아 일자리 같은 이슈를 선점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아야 이로울 것이다. 그게 나라에 이로운 길이기도 하다.

 관전자로서 일자리에 관하여 감히 훈수를 한번 두어 보자.

 민주당 일자리 공약에는 숫자가 많다. 5년간 새로운 일자리 연 66만 개씩 330만 개 창출, 고용률 70% 달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장 근로시간인 연간 2193시간을 2000시간 이하로 단축하여 일자리 나누기, 50%인 비정규직 비율을 25% 수준으로 축소, 최저 임금을 전체 평균 임금의 50%로 현실화, 헌법 32조(근로의 권리 조항)를 준수하는 일자리 32만 개를 매년 만든다 등등.

 이 같은 수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부분적으로 제시하곤 있지만 전체가 수학 공식처럼 맞아떨어지기엔 역부족이다. 성장률 변수 하나만 달라져도 죄 틀려나갈 수치라, 그랬으면 오죽 좋으련만 할 수준이다. 정부가 강제로 할 수 있는 것과 민간이 움직여줘야 할 부문이 섞여 있기도 하다. 의욕은 넘쳐 보이는데, 믿음을 주기엔 모자라는 점이 많다.

 새누리당 일자리 공약엔 수치 목표가 거의 없다. 대신 ‘어떻게’에 집중하고 있다. 일자리 ‘나눔’은 공공 부문에서 청년·정규직 채용으로 정부가 이끌고, 청년 창업 ‘도전’은 창업자금 시장을 키우고 벤처기업 인수합병(M&A) 거래소를 만들어 북돋는다는 식이다.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는 조건으로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지원하는 방안도 들어있고, 임금피크제와 엮어서 정년 60세 의무화를 추진한다는 구상도 내놨다.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은 무리 없이 다 모아 놓았는데, 그걸 뛰어넘어 더 큰 그림을 그리는 발상이 아쉽다.

 대선이 아직 꽤 남았으니 양당은 일자리 공약을 더 보완해 좋은 작품을 내놓고 표를 가져갈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서로 갈려도 좋고 겹쳐도 좋고 베껴도 좋다. 다만 그 과정에서 양쪽 모두 수준을 더 올려야 한다.

 한 가지 참고할 것은 안철수 원장의 최근 강연 내용이다.

 4월 초 전남대 강연에서 안 원장은 미국 경제학자 맨서 올슨의 저서 『집단 행동의 논리』를 인용했고, 경북대 강연에서는 일자리 창출을 이야기했다. 조직화된 소수 이익 집단에 끌려다니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맨서 올슨 저서의 핵심 내용인데, 이는 일자리 창출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조직화된 소수 이익 집단은 기득권을 안 놓으려 한다. 여기엔 생산자 단체, 정규직 노조, 대기업 등도 있다. 이들이 생각과 행태를 바꿔야만 소비자 이익을 위한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과의 일자리 나누기, 벤처·중소기업이 일어나는 산업 생태계 구축이 가능하다.

 근로 시간·일수를 줄여 일자리 나누기를 한다 치자. 기존 노조가 임금 올리기를 고집하는 한 어렵다. 스웨덴 등 북유럽에서는 힘센 노조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스스로 양보를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

 벤처 기업이 궤도에 오르면 합당한 값에 대기업이 사주어야 서로 좋다. 대기업이 비슷한 아이디어와 기술로 새 사업부를 만들어 모처럼 일어난 벤처기업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걸 잘했다고 승진시키면 안 된다.

 고속도로 나들목에 하이패스가 늘면서 기존의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대신 소프트웨어 등 다른 곳에서 더 좋은 일자리가 생겨났다. 그런 변화에 미래가 있다.

 이런 것을 끌어내는 것이 비전이고 정치 지도력이다. 안 원장은 구체적 방안까지 세세히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소수 이익 집단을 이야기하면서 핵심을 짚었다.

 소수 이익 집단은 목소리가 크지만 더 많은 표는 목소리 크지 않은 다수에게서 나온다. 대선 공약도 그 점을 보아야 한다.

김수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