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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127살 젊은 한옥, 화가 장욱진 고택

중앙일보

입력

고(故) 장욱진 화백의 장녀인 장경수(67)씨가 고택을 둘러보고 있다. 미술 거장의 발자취는 집안 곳곳에 남아 있다.

한적한 도로를 지나 아파트 단지 사이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자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고택이 펼쳐진다. 오래된 대문은 예술인의 향취로 흠뻑 젖어있고, 마당에 병풍처럼 펼쳐진 소나무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자연과 한옥이 안정감 있게 어우러져 잠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장욱진(張旭鎭) 고택’으로 초대한다.

초가집에 기와와 기둥 덧대 고풍 리모델링

 외국에는 반 고흐나 모네와 같은 거장의 생가가 있다. 국내에도 잘 보존된 예술가의 생가가 있다. 용인의 ‘장욱진 고택(마북동 244-2)’은 도심 속 전통 한옥의 모습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2008년에는 문화재(제404호)로 등록되기도 했다. 고 장욱진(1918~1990) 화백은 서양화가 1세대로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현대 미술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 곳에는 127년 된 한옥과 전시실이 있어 자녀들을 데리고 문화체험 하기에 좋다.

 판교 나들목에서 신갈 방면 국도를 타고 들어와 용인시 마북동으로 들어가면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잘 보존된 그의 고택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진 기본 구조의 한옥 곳곳에는 장 화백이 생전에 추구했던 예술세계의 흔적이 남아있다.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기와와 기둥을 덧대 고풍스런 한옥으로 거듭난 집이다. 미술 거장이 전통한옥을 리모델링해 살았던 공간이다.

 마당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관어당(觀魚堂)’이라는 원두막이 보인다. 연못의 물고기를 바라보는 곳이라 해서 관어당이란 이름이 붙었다. 원두막을 지나자 정갈하게 지어진 양옥이 보인다. 한옥에 기거할 때 화장실을 다니다 감기에 걸릴 것을 우려해 따로 이 양옥을 지었다고 한다. 장 화백의 설계도를 토대로 건축됐는데 후에 그의 그림에도 더러 등장한다. 문화재 안에도 포함돼 있다. 장욱진 고택의 문화재 선정여부 심사 당시 심사위원들은 “장욱진 화백에게 있어서 ‘집’은 무척 중요한 요소였다”며 “우리나라 문화재 중 가장 젊은 문화재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

 장 화백은 20세기 초 한국 근현대 회화사를 주도한 작가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했던 그의 정신은 고택에도 고스란히 나타나있다. 교수 시절을 제외하고 별다른 직업 없이 유유자적한 삶을 살던 장욱진에게는, 집과 가족, 나무와 주변이 중요한 그림의 소재였다. 그는 “나를 장 교수나 장 화백이라 말고 화가(?家)라 불러달라”고 말하곤 했다. 또 “화가라는 이름 안에 있는 집 가(家)자가 좋다”고도 했다.

 고택과 양옥을 가로질러 반대편 대문 쪽으로 내려오면 집운헌(集雲軒)이라는 별채가 있다. 구름이 모이는 집이라는 이 곳에서는 고택을 찾는 방문객들을 위해 커피와 전통차를 판매한다. 장 화백은 생전에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만큼 커피가는 기술도 뛰어났는데, 지금은 그의 딸이 이 곳에 와서 방문객들에게 커피를 갈아주기도 한다.

간결한 공간서 일상의 복잡함 털기에 그만

 고택 곳곳에서는 장 화백의 일상을 만날 수 있다. 장녀인 장경수(67) 장욱진문화재단 이사는 “만년에 천식이 심했던 아버지는 술 대신 커피를 즐겼고, 커피 만드는 솜씨는 일류바리스타 못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 “안채에서 자주 커피를 갈아 주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친구들을 데려와 커피를 달라고 하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며 웃었다.

 고택에 도둑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노인들이 살고 있던 고택에 도둑 2명이 침입해 화실을 망가뜨리고 각종 집기와 그림들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도둑들은 안채에서 태연히 과일까지 깎아 먹고 도망쳤는데, 정작 가져간 것은 장 화백이 한지에 그리던 연습 그림뿐이었다. 장 화백이 평소 한복을 입고 한옥에서 사는 것을 본 도둑들이 동양화가로 오해한 덕분이다. 장 이사는 “중요한 그림은 도둑맞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무척 화가 나 계셨다”며 “당신의 그림을 가져가지 않고 쓸데없는 것만 들고 갔다며 ‘그림도 볼 줄 모르는 놈들’이라고 투덜거리셨다”고 회상했다.

 장 이사가 꼽는 고택의 장점은 안정감과 편안함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깔끔한 공간과, 자연이 맞닿아 있는 고택은 일상의 복잡함을 떨쳐내기에 그만이라는 것. 장 이사는“사실 집이라는 공간이 그렇게 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아버지의 방도 한 칸에 불과했는데 한옥이 주는 안정감이 그만큼 좋다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방이 좁아도 대신 거대한 자연을 공유하며 사는것이 고택의 삶이 아닐까 한다”고 덧붙였다.

※장욱진 고택 봄 전시회=?한운성 전(展)’이 이달 16일까지, 매일 오전 10시~오후 4시 열린다(월요일 휴관).

▶ 문의=031-283-1911

<김록환 기자 rokany@joongang.co.kr 사진="김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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