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렵해지고 잘 꾸미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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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호 14면

‘미중년’의 정의를 찾아보았다. 국어사전은 그것을 ‘불황 속에서 퇴직 연령이 낮아지고 젊은 구직자들이 늘면서 나이가 들어 보이면 사회적으로 불리하다는 인식으로 인해 자신을 꾸미는 멋진 중년 남성들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바로 어제, 다소 민망하게 입을 벌린 채 비스듬히 누워 어느 미중년을 목격한 셈이었다. 그는 얇은 의료용 고무장갑을 낀 채 내 구강을 유심히 들여다본 후 “잇몸이 좀 낮긴 하지만 뽑기 어렵진 않겠네요”라고 말했다. 많이 웃은 탓에 자연스레 눈과 입가에 주름이 생긴 남성의 얼굴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드러운 톤의 목소리였다.

소설가 백영옥이 본 미중년

그가 10초 만에 내 입 안에서 뽑기 힘들다는 사랑니를 단숨에 뽑아냈을 때, 나는 드러난 그의 팔뚝을 꽉 잡고 “고마워요!”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눈을 덮었던 가리개를 걷고 보니 비로소 그 남자의 얼굴이 보였는데, 내 사랑니를 뽑은 치과원장은 마흔이 훌쩍 넘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잘 입고 잘 꾸미고 날렵해지는 것만으로 미중년이 성립되진 않는다. 영화 ‘머니볼’의 주인공 브래드 피트가 좁은 구단 사무실에서 자신이 원하는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전화를 귀에 대고 다른 구단과 숨 가쁘게 협상을 벌일 때, 마침내 협상이 타결돼 환호성을 지를 때, 그가 보여주는 몸의 동선엔 먹잇감을 쟁취한 수컷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축적된 연륜과 경험이 아닌, 철저히 과학과 데이터만으로 야구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 남자가 보여준 파격의 결과물이라 더욱더 그랬다.

브래드 피트가 트레이닝복 차림만으로 미중년이 될 수 있는 건 홍콩배우 저우싱츠(周星馳·주성치)가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하나로 최고의 섹시가이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치와 똑같다. 중요한 건 삶에 대한 어떤 ‘태도’와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저우싱츠가 빳빳한 슈트에 언제라도 100m 달리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날렵한 스니커즈를 신고 나타났을 때 그는 정말 멋졌다. 평소 자신이 추구하는 액션과 코미디의 철학을 패션으로도 보여줬던 셈이다. 내가 아는 어느 패션지 편집장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 양말 색 하나 제대로 못 맞추는 사람이 어떻게 운율을 제대로 맞출 수 있겠어?” 이때 패션은 절대 ‘옵션’이 아니다.

여자의 권력이 피부와 주름살로 확인받는 시대에선 세월은 절대적으로 여자에게 불리하다. ‘물광피부’ ‘꿀피부’ 같은 새로운 말이 계속 생산되고, 주름을 제거하라는 광고가 창궐하는 곳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남자들에겐 ‘미중년’이란 새로운 조어가 헌사됐지만, 여자에겐 그런 단어조차 없다. 이쯤 되면 뭔가 억울한 생각이 들지만 멋지게 나이 든 여배우의 숫자보다 멋지게 나이 든 남자 배우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걸 보면 별 수 없이 그게 현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단체로 나와 복근을 보여주는 아이돌그룹이 아니라 영화 ‘박쥐’에서 보여준 송강호의 단단한 어깨와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보여준 ‘슈트발’에 관심이 간다. 법학자 조국 서울대 교수의 희끗한 머리에서 느껴지는 지성과 배우 제러미 아이언스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관능을 엿본다. 젊은 사람이 갖지 못한 실패와 성공의 연대기가 그들의 스타일과 교차돼 빛나기 때문이다.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불행은 시작된다. 미중년은 세월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세월을 즐긴 사람들이 가지는 타이틀인지도 모르겠다. 내 사랑니를 발치한 치과의사가 미중년으로 보였던 것도 어쩌면 그가 가진 전문성과 안정감이 빛을 발한 순간, 내가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던 것이기 때문인지도.


백영옥 1974년생. 2008년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아주 보통의 연애''다이어트의 여왕''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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