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인종, 국가의 벽을 허무는 빅리그

중앙일보

입력

19세기 후반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침체된 분위기를 회복하기 위해 메이저리그라는 프로야구를 탄생시키게 된다. 그리고 20세기 전반까지 메이저리그는 백인들만의 전유물로서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런 추세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었다.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이라는 흑인이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다. 하지만 흑인해방과는 상관없이 극성을 부리던 당시의 인종차별적인 분위기 속에서 로빈슨이 활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같은 팀은 로빈슨이 소속된 브루클린 다저스와 경기를 해야 할지 여부를 논의할 정도였으며, 다저스 선수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팀동료 로빈슨에 대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모든 선수들이 얼굴을 시커멓게 칠하고 경기를 치르는 해프닝까지 연출되었다.

그러나 로빈슨은 꿋꿋하게 경기를 치러내며 그 해 신인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무대에 선지 27년이 지난 1974년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소속의 행크 아론은 베이브 루스가 가지고 있던 통산 최다 홈런 714개를 넘어서며, 20세기 후반 메이저리그 역사를 백인으로부터 흑인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루스의 기록을 넘어서기 위해 아론은 하나의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그것은 로빈슨이 경험했던 바로 인종차별의 벽이었다. 이미 루스의 기록이 깨질 것을 알고 있었던 남부의 백인들은 전국에 걸쳐 주소가 쓰여진 협박편지를 보내어 아론이 경기에 나오지 않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아론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74년 4월 8일 행크 아론은 자신의 통산 715번째 홈런을 기록하며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역사 속으로 흘려보냈다.

50년대부터 70년대에 뉴욕 자이언츠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거친 강타자 윌리 메이즈는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3천안타를 돌파했고,현재까지도 3백홈런, 3백도루, 3천안타를 모두 돌파한 유일한 메이저리거로 남아 있다. 또한 그는 660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아론에 필적하는 흑인 홈런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80년대로 넘어오면서 흑인과 기타 비미국인들의 활약은 더욱 커져갔다.

81년 멕시코 출신의 페르난도 발렌주엘라는 신인왕과 사이영상을 동시에 차지하였고, 88년 쿠바 출신의 호세 칸세코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40홈런-40도루라는 대위업을 달성했다. 호세 칸세코는 비미국인으로서 최초로 400홈런을 달성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니카라과 출신의 데니스 마르티네스는 비미국인으로서 최초로 2백승을 달성하였고, 역사상 최초로 4백홈런-4백도루 클럽에 가입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강타자 배리 본즈도 흑인이다.

90년대에는 아시아인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었던 메이저리그도 이젠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왔다.

94년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역사상 17번째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하였고, 95년에는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올스타전 선발투수출장과 함께 신인왕 수상이라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후에도 수많은 한국과 일본의 야구선수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태평양을 건너 갔다.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새미 소사는 최초로 2년 연속 60홈런을 기록함으로써 90년대를 대표하는 타자 중의 한 명이 되었고, 이와 함께 또 다른 도미니카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97년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에 이어 99년에는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하며, 메이저리그를 서서히 평정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마르티네스에게는 또 다른 칭호가 따라 붙고 있다. 바로 최고의 투수에 대한 평가인 월드시리즈 7차전 선발투수가 그것이다.

로빈슨 시절에 없었던 Affirmative Action(적극적 평등실현조치)이 지금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적용되고 있지만, 이들은 이러한 제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실력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이들이 없는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려울 정도로 이들은 메이저리그의 한 부분이 되었다.

현재 아론의 통산최다 홈런기록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 신시내티 레즈의 켄 그리피 주니어는 흑인이다. 12년간 438개의 홈런을 기록한 그리피는 현재의 추세가 이어진다면 앞으로 9년 후에 아론의 기록을 넘어서게 된다.

흑인으로서는 비교적 귀여운 외모에 천재적인 타격능력을 지닌 그리피는 완전하게 극복되지 않은 인종차별 분위기 속에서도 그가 아론의 기록을 넘어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낼 때 아론와 같은 협박은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리피는 백인이 아닌 흑인 행크 아론의 기록을 넘어서게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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