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줄 말이…" 이혼한 아빠가 딸에게 보낸 것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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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간해선 웃지 않던 아버지도 딸을 볼 땐 달랐다. 1일 서울 사간동 두가헌갤러리에서 딸 현주씨와 함께한 김종학 화백.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화가는 마흔둘에 가정으로부터, 화단(畵壇)으로부터 도망쳐 설악산에 파묻혔다. “내 맘대로 살고, 내 맘대로 그리고, 고독하고 싶었다”며 그때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는 게 있었다. 아이들이었다. 감수성 예민할 나이에 부모의 이혼을 겪은 남매가 눈에 밟혀 화선지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수채화도 그려 넣었다. 무명화가인 아빠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설악산 화가’로 유명한 김종학(75)이 그림 다음으로 열심히 한 일은 아이들에게 편지 쓰기. 김씨는 경기고,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후 당대 유행하던 비정형 추상화에 심취했다. 설악산에 들어가 30여 년간 야생화를 그렸다. 50대까지 무명이었지만 지금은 대중이 사랑하는 화가가 됐다. 작품이 가장 많은 국내 작가(4000여 점)로 꼽힌다.

 “좋은 그림 100장도 못 남기고 너희들이 커서 ‘너희 아빠는 화가였는데 그림도 몇 장 못 그린 시시한 인간이었구나’라고 비난을 받으면 죽어서도 난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어. 100장만이라도 그릴 때까지 억지로라도 살자며 입술을 깨물고 그림을 그린 것이 오늘날 나비, 꽃 그림을 나오게 했단다.”

1987년 김종학씨가 딸에게 보낸 새해 편지(사진 왼쪽). 무지개 그림에 ‘모든 게 뜻대로 되기를 빌겠다’는 덕담을 붙였다. 오른쪽은 91년 8월 8일 새벽 딸에게 쓴 편지. 김씨의 ‘상징’인 야생화를 그려 넣었다. [사진 갤러리현대]

 때론 동년배 사촌에게 하듯, 때론 도반(道伴)에게 하듯 설악산에서 혼자 그림 그리며 부딪치는 어려움과 즐거움, 그리고 가정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을 털어놓았다. 화가는 편지로 딸을 격려했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수없이 편지를 쓰며 화가로서의 존재 이유를 설명했듯…. 1985년부터 올해까지 28년간 250여 통을 띄웠다.

 그 사이 아버지를 닮은 딸은 미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부모가 됐다. 외할아버지 같은 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을 키우고 있다. 딸 현주(43)씨는 혼자만 아껴 보던 아버지의 편지를 세상에 처음 공개했다. 부모가 이혼했을 때 열두 살, 주위 시선이 무서워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 그였다.

 “화가는 육십이 넘어서야 되고 시인은 칠십이 넘어서야 된다는 너희 증조할아버지의 말씀이 꼭 맞는 것 같다. 서서히 그러나 쉬지 말고 부지런히 해야만 육십 이후에 완성에 이를 수 있단다.” 54세의 화가는 편지에 스스로에 대한 위안을 담기도 했다. 동시에 주부가 된 딸에게 용기도 줬다.

 1일 오후 김 화백 부녀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화가에게 물었다. 왜 그리 열심히 썼느냐고. “한편으론 외로워서, 또 (딸이) 걱정스러워서, 그리고 편지가 오가다 보면 우리 사이에 쌓이는 게 있겠지 싶어서”라고 할아버지가 된 노화가가 천천히 답했다. 엄마가 된 딸이 말을 이었다. “편지를 공개하고 책으로 묶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어서였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아버지께서 써주신 편지에 다 담겨 있었거든요.”

 김 화백이 딸에게 쓴 편지 40여 통과 드로잉 20여 점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과 두가헌갤러리에서 5∼27일 공개된다. ‘김종학의 다정(多情)’전이다. 『김종학의 편지』(마로니에북스)도 나왔다. 관람료 무료. 02-2287-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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