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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파 낳은 청춘의 박탈과 절망 90년대와 2000년대 다를 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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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경찰에 붙잡힌 지존파 주범 김현양. “인육을 먹었다”고 말해 한국 사회가 충격에 휩싸였다. [중앙포토]

박탈감은 청춘들의 오랜 질병이다. 이 병은 사회 갈등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경제는 맹렬히 성장해 왔는데, 어찌하여 청춘의 삶은 고단하기만 한가. 소설가 유현산(40·사진)은 이 고질적인 박탈의 질병을 추적했다.

 그랬더니 1990년대 중반의 끔찍한 사건과 마주쳤다. 지존파 살인사건. 이 사건은 90년대의 물질적 풍요로움에 가려져 있던 20대 하층계급의 박탈감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였다. 그리고 그 박탈감은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못한 채, 고된 청춘들을 감염시키는 중이다.

 유현산의 장편소설 『1994년 어느 늦은 밤』(네오픽션)은 90년대 지존파 사건을 다룬 스릴러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청춘의 박탈감을 되짚는 이야기다. 작가는 실제 지존파를 닮은 가상의 조직 ‘세종파’를 중심 축으로 삼았다. 소설은 세종파의 공범이자 인질로 10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한동진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신한국’을 맞이하는 희망으로 부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란 골고루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온갖 개발 계획에 떠밀려 서울의 하층민은 절망으로 내몰렸다. 빈민촌 아이들에게 희망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자라 세종파를 꾸린다. 돈이 없어 병든 어머니를 포기하게 된 주인공 세종은 범죄집단을 결성해 친구들을 끌어들인다. 자신들의 범죄를 ‘사회에 대한 복수’로 규정하고 닥치는 대로 살인을 한다. 소설은 스릴러 장르 특유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세종파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 끔찍한 사건은 개인의 돌발적 행동인가, 사회 구조가 빚은 참사인가.

 “90년대 맥락에서 지존파를 파내어 그 자리에 가상의 범죄 집단을 심어놓고 어떤 암종으로 자라는지 관찰하고 싶었다”고 작가는 적었다. 그 관찰의 결과가 이 소설이다. 소설은 2000년대의 절망의 뿌리를 90년대에서 찾고 있다. 작가는 “지존파와 우리는 90년대라는 같은 문으로 들어가 서로 다른 문으로 나왔을 뿐”이라고 했다.

◆지존파 사건=김현양·김기환 등 6명이 ‘지존파’라는 범죄 집단을 만들어 1993년 4월부터 94년 9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납치·살해를 저지른 사건. 주택에 사체 소각 시설까지 갖춘 엽기적인 살인으로 충격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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