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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게임으로 번진 ‘원탁회의’ 밀약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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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양원보
정치부문 기자

원탁(圓卓·round table)은 6세기께 영국 아서왕 전설에서 유래했다. 아서왕은 지방 토호세력인 기사(騎士)들을 원탁에 둘러앉게 해 회의를 했다. 긴 사각 탁자에선 자리다툼으로 인해 불필요한 신경전이 빚어졌던 탓이다. 원탁에선 상하 계급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원탁은 그때부터 자유·수평적 토론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제1야당인 민주통합당에서 원탁회의는 ‘월권(越權)’ ‘무소불위(無所不爲)’ 같은 부정적 뉘앙스로 통하고 있다. 재야 원로인사들의 모임인 ‘희망2013·승리2012 원탁회의’ 때문이다.

 원탁회의는 당초 민주통합당 이해찬 고문과 박지원 최고위원 간 ‘당대표·원내대표 투톱 밀약’ 논의 과정에서 적극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 고문이 25일 원탁회의 인사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밀약’에 대한 원로들의 동의가 있었던 것처럼 설명했고, 박 최고위원 역시 26일 원내대표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 고문으로부터 원탁회의의 공동 의견을 전달받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당내에서 “원탁회의가 상왕(上王)이냐”는 거센 반발이 일었다.

 월권 논란이 거세지자 원탁회의 측은 27일 보도자료를 내고 “민주당 내부 경선 등과 관련한 논의를 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좌장 격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도 “이 고문이 ‘박 최고위원과 힘을 합치기로 했다’고 하기에 일부가 ‘잘해 보라’고 덕담을 건넨 수준”이라고 말했다. 원탁회의와 이·박 양측 가운데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논란이 진실게임으로 변질되자 이젠 이 고문과 박 최고위원 측 말도 달라졌다. 박 최고위원 측은 “이 고문이 분명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이 고문 측은 “연대에 긍정적인 원탁회의 분위기를 박 최고위원이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 같다”며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정리해 보면 이·박 두 사람이 밀실합의의 비(非)민주성을 덮으려 원로들의 권위를 슬쩍 이용하려다 이들이 부인하면서 스텝이 꼬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고문과 박 최고위원은 분명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 거짓말을 했다고. 원탁회의도 이들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원로모임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선 당연한 조치다. 원탁회의도 경솔했다. 오얏나무 아래선 갓끈도 고쳐 매지 말라고 했다. 원탁회의 대표단 21인 중 다수가 민주당 주축들이다. 논란의 주체인 이 고문과 문재인 고문, 심지어 당대표인 문성근 대표권한대행까지 버젓이 대표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월권 논란이 그렇게 부담스러웠다면 진작에 이들을 솎아내든지 모임을 해체했어야 옳았다.

양원보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