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 신부끼리 라틴어 통화로 도청 피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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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분도출판사를 이끌었던 독일 출신 임인덕 신부의 전기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가 나왔다. 임 신부는 “책과 영화를 통한 문화선교는 사람들이 더 친근함을 느껴 효과적”이라고 했다. [조문규 기자]

베네딕도 수도회는 한국에 있는 가톨릭 수도회 150여 개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다. 특히 ‘문화선교’로 유명하다. 1909년 한국 땅에 발을 들인 이래 분도출판사·베네딕도미디어 등을 통해 수준 있는 책과 외화(外畵)를 보급해 왔다.

 분도(芬道·베네딕도의 한자 음역, 뜻은 향기로운 길)출판사가 올해로 등록 50주년을 맞았다. 수도회는 이에 맞춰 다음 달 초 기념 서적을 몇 권 낸다. 신앙의 현장을 지도와 함께 설명하는 『성경 역사 지도』, 1911년 수도회의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수도원장)가 조선을 여행한 기록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 등이다.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도 나온다. 71~94년 출판사 사장을 맡은 독일인 임인덕(林仁德·77·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 신부에게 헌정하는 책이다.

 임 신부는 70∼80년대 운동권 대학생 필독서였던 『해방신학』, 80년대를 장식한 이해인 수녀의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을 만들었다.

 25일 오후 서울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에서 임 신부를 만났다.

 출판사를 그만둔 뒤부터 베네딕도미디어를 이끌어 온 그는 지난해 성탄 직전 새 영화 대본 한글 번역을 검토하러 상경했다가 주택가 골목길에서 낙상했다. 190㎝에 가까운 거구인데다 건강 체질이지만 잘 낫지 않아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치료받고 있다.

 “이 책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분도출판사를 기념하려면 처음 북한에서 한 일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나 말고도 출판사를 위해 애쓴 사람들이 많은데…. 내 누이동생 얘기도 나오고, 남동생이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나오고….”

 임 신부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이런 소박하고 우직한 성격대로, 그는 상업적으로 이득이 되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책과 영화를 평생 소개해왔다. 10년 넘게 번역해 91년 출간한 『200주년 신약성서』는 개신교 신자들도 구해 볼 만큼 잘 된 번역으로 꼽힌다.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스웨덴 출신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산딸기’ 등 예술영화를 소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는 70∼80년대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정권의 감시를 피해 삐딱한 책을 만들고 불온한 영화를 대학가에서 이동식 영사기로 상영하던 무용담을 특유의 어눌한 한국어로 애써 소개했다. “체포돼 추방될 수도 있었지 않냐”고 묻자 “전화 도청을 피하기 위해 독일인 신부들끼리는 라틴어로 통화했다”는 비화도 털어놨다.

 “왜 그런 위험을 무릅썼느냐”는 질문에는 “처음에는 신학책을 냈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강론에서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경북 안동의 주교님도 정부에 비판적인 것을 보고 독재를 비판하는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요즘 임 신부의 관심은 영화에 꽂혀 있다. “키에슬롭스키 같은 감독의 작품에는 난해한 논리가 아니라 비유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다. 좋은 영화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꾼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신앙을 우직하게 실천해온 수도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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