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경기, '둔화'인가 '일시조정'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내년의 반도체 경기를 놓고 주요 시장조사기관들의 의견이 대립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의 시장조사기관인 IC인사이츠는 최근 세계 반도체 시장이 본격 형성된 지난 70년 이래 6번째의 경기둔화가 내년부터 가시화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IC인사이츠는 세계 반도체 업계의 설비투자는 올해 사상 최대의 호황에 힘입어 80%에 육박하는 기록적인 증가추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내년에는 10% 이하로 큰 폭의 둔화세를 보일지 모른다는 부정적 입장이다.

IC인사이츠는 지난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반도체 경기는 줄곧 세계 경제불황과 업체들의 설비 증가, 재고 조정 등 3가지 요인에 좌우돼 왔다면서 이들 요인이 내년의 반도체 경기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세계 경제 성장률이 올해 4.8%에서 내년에는 3.5% 이하로 떨어지고 설비투자 증가율은 종전 최대의 호황기였던 95년보다 높아 당장 생산능력 과잉과 재고 누적이 경기를 감속시킬 것이라는 것이 IC인사이츠의 시각이다.

IC인사이츠는 최근 반도체 가격이 약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경기 둔화가 임박했음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번 경기둔화는 내년은 물론 내후년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이번 경기둔화의 충격은 소폭에 그칠 것이며 2년 뒤인 2003년에는 20%이상의 고성장이 예상된다는 것이 IC인사이츠의 지적이다.

반도체 경기 둔화론이 등장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 여름 미국 살로먼 스미스 바니 증권사의 애널리스트인 조너선 조셉이 경기둔화를 주장해 세계 증시에 충격을 미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IC인사이츠가 주요 시장조사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경기둔화를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반도체 경기 둔화론에는 더욱 무게가 실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반도체 업계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미국의 시장조사기관인 데이터 퀘스트는 최근 반도체 업계의 침체로 경기둔화를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데이터퀘스트는 지난 몇달간 지속되는 악재들로 경기둔화를 외치고 싶은 유혹이 크겠지만 99년 중반부터 시작된 경기 상승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닐 뿐더러 장기 전망은 여전히 밝다는 낙관론을 견지하고 있다.

데이터퀘스트의 반도체 담당 애널리스트인 제임스 하인스씨와 짐 핸디씨는 지난 주말에 발표한 기고문에서 최근 반도체.장비업계가 고민하고 있는 수요부진은 과대포장된 기대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의 매출 규모는 2천310억 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며 2004년까지 연평균 15%의 안정적 성장을 거둘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제시하는 내년의 예상성장률도 37%에 이른다.

데이터퀘스트는 반도체 경기는 1.4분기에 바닥을 친 뒤 2.4분기부터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해 4.4분기에는 정점에 이르는 것이 통례이지만 올해는 1.4분기와 2.4 분기에 상승곡선을 긋다가 후반기부터 하락한 것이 다르다고 말했다.

하인스씨 등은 1.4분기와 2.4분기의 이상 과열로 시장조사기관과 업체들이 하반기의 수요를 오판했다면서 3.4분기와 4.4분기의 침체는 과잉기대에 따른 조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기관의 의견이 이처럼 대립됨으로써 반도체 업계의 혼란은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그러나 반도체가 해외 수출, 더나아가 국가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당분간 경기논쟁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