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 (20) - 랠프 카이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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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그렇다. 야구는 '통계의 경기'이다.

많은 사람들은 통계를 야구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생각한다. 일본식의 '통계 야구'에 길들여진 팬이나 감독들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통계를 취급하는 방식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하는 팬들은 통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타율이 단순한 안타 수보다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한 선수의 안타 생산 능력을 평가할 때에는, 그 선수의 안타 수가 얼마나 많은 기회에서 얻어진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홈런은? 마찬가지이다. 어느 선수의 홈런을 치는 능력을 가늠하려면, 단순한 홈런 수의 합계보다는 타수와 홈런의 비율을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팬들이 통계를 다루는 방식은 바뀌기 어렵다. 팬들은 자신들의 사고 방식대로 통계를 취급하고, '일반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통계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를 '훌륭한 선수'로 여긴다. 이는 매우 비합리적이다.

단순한 역대 선수들의 홈런 랭킹에 관심을 기울이는 팬들은 많다. 그리고 이 순위에서 1-2위에 랭크된 인물이 행크 에런과 베이브 루스라는 사실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선수들의 홈런 생산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타수와 홈런 수의 비율'의 랭킹을 살펴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렇다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과거의 강타자들을 이 수치에 따라 늘어놓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1위는 대부분의 팬들이 예측하는 대로 루스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누가 올 것인가? 에런? 미키 맨틀? 테드 윌리엄스? 마이크 슈미트?

그러나 그 선수의 이름을 듣는다면 일반적인 한국의 야구 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랠프 카이너. 이 선수를 안다면, 대단한 메이저 리그 팬임이 틀림없다.

모든 선수들의 타수를 1만으로 놓고 계산한다면, 루스의 홈런 수는 850개가 되며 카이너는 709개의 홈런을 친 셈이 된다. 루스는 실제로는 8399타수를 통해 714홈런을 날렸으며 카이너는 5205타수에 369홈런을 기록하였다.

3위에 랭크되는 인물은 703개(실제로는 573개)의 하먼 킬브루이며, 600대 중반에 머무르는 윌리엄스와 윌리 메이스가 그 뒤를 잇는다. 그 다음에 맨틀과 지미 팍스, 슈미트 등의 이름이 등장하며 에런은 좀더 쳐져 있다.

물론 홈런의 수는 시대적 상황이나 구장의 형태 등에 영향을 어느 정도 받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앞에서 본 순위가 곧 홈런 생산 능력의 정확한 순위라고 단정짓는 것은 절대 무리이다. (마크 맥과이어를 루스보다 위대한 홈런 타자로 볼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위는, 적어도 카이너가 타자로서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었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로서는 충분하다. 카이너는 단 10시즌만을 소화하고 은퇴하였기 때문에 에런처럼 금자탑을 쌓아올리지는 못했지만, 전성기에는 자신를 능가하는 슬러거를 찾지 못했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최다 시즌 연속 홈런 1위 기록이다. 그는 1946년에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빅 리그에 데뷔한 후 7년 동안 리그 홈런왕 자리를 지켰다. 7년 연속 홈런왕 등극은 오로지 그만이 보유한 기록이다.

홈런왕에 오른 횟수가 그보다 많은 선수는 루스(12회)와 슈미트(8회)뿐이다. 에런은 이 타이틀을 4번 차지하는 데에 그쳤으며, 맨틀과 윌리엄스, 메이스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장점은 장타력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신인 시절을 제외하면 항상 뛰어난 선구안의 소유자였다. 그는 4구 부문에서 3번이나 리그 1위를 마크했으며, 1951년에는 출루율 수위에 올랐다. 특히 이 해에는 삼진 수보다 80개나 많은 4구를 얻기도 했다.

그는 기량뿐만 아니라 뛰어난 용모로 인해 더욱 인기를 끌었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에 파이어리츠가 하위권을 맴돌았음에도 불구하고 홈 구장이었던 포브스 필드에 팬들이 넘쳐난 것은 순전히 카이너 때문이었다.

많은 팬들은 카이너의 마지막 타석을 지켜본 뒤 경기가 진행 중이라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경기 자체가 아니라 카이너라는 한 명의 스타였던 것이다.

또한 그의 빅 리그 입성에 때맞춰 "WhIte Christmas"로 유명한 가수 빙 크라즈비가 파이어리츠의 지분 중 일부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카이너는 헐리우드에 드나들게 되었다. 그는 리즈 테일러나 에스더 윌리엄스 등의 유명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으며,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카이너는 뉴멕시코 주 샌터 리터에서 출생하였으나, 성장기를 주로 캘리포니아 주의 앨햄브러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장타력으로 이름을 날렸고, 13세의 나이에 세미 프로 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에게 처음으로 스카우트의 손길을 뻗친 팀은 뉴욕 양키스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였다. 카이너는 파이어리츠에 입단할 경우 좀더 빨리 빅 리그에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고, 결국 '벅스(Bucs)'의 멤버가 되었다.

1941년부터 파이어리츠의 팜 팀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기대대로 놀라운 타력을 선보였으나, 2차 대전의 광풍은 그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는 인터내셔널 리그의 토론토에서 활약하던 중인 1943년에 군 징집을 받게 되었다.

1945년 말에 군에서 돌아온 카이너는, 이듬해인 1946년을 앞두고 빅 리그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시즌 초부터 주전으로 기용된 그는, 이 해에 23홈런을 날려 이 부문 리그 수위에 올랐다.

신인이 리그 홈런왕에 오른 것은 1904년 해리 럼리 이후 처음이었다. 또한 카이너는 파이어리츠 선수로서는 1902년 토미 리치 이후 처음으로 이 타이틀을 차지하였으며, 동시에 1938년 자니 리조가 세운 팀 역사상 시즌 최다 홈런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카이너의 문제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의 선구안은 항상 지적 대상이었으며, 그는 아무 볼에나 배트를 휘두르는 버릇 때문에 리그 최다인 109개의 삼진을 당하였다.

1947년을 앞두고, 파이어리츠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방출된 슬러거 행크 그린버그를 내셔널 리그 역사상 최고액인 10만 달러의 연봉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이는 카이너의 야구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타이거스에서 홈런왕과 타점왕에 각각 4회 등극했던 대스타인 그린버그는 카이너에게는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린버그는 '촌뜨기'였던 카이너에게 타격 기술뿐만 아니라 도시인에게 걸맞는 행동 양식도 가르쳤고, 카이너가 모든 면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카이너는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행크의 조언 덕에 타석에서 어디가 적절한 위치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바깥쪽 볼을 밀어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그는 내게 나쁜 볼에 스윙하는 것을 삼가라는 말을 했고, 나의 타격 자세도 교정해 주었다."

또한 카이너는 그린버그를 "나의 일생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라 칭했다. 그린버그에 대해 카이너가 느꼈던 것은 한편으로는 '우정'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존경심'이었다.

당시 파이어리츠는 그린버그를 데려오기 위해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 일환으로 포브스 필드의 외야 좌측에 2개의 불펜을 만들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오른손 슬러거에게 유리하도록 타석과 좌측 펜스 사이의 거리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는 카이너와 그린버그에게 상당한 이점을 제공하였다. 포브스 필드는 본래 펜스가 타석과 멀어 홈런을 치기 어려운 구장으로 유명하였으나, 이 조치로 인하여 적어도 우타자에게는 그러한 불리함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1947년 초에 카이너는 부진의 늪에 빠졌다. 5월 말까지 그가 날린 홈런 수는 3개에 지나지 않았다. 구단은 그의 경험 부족이 문제라고 판단하였고, 그를 다시 마이너 리그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린버그는 구단주 프랭크 머키니에게 카이너는 조금만 있으면 제 모습을 찾을 것이니 그에게 조금 더 기회를 주기 바란다고 강력히 청원하였다. 머키니는 엄청난 공을 들여 데려온 그린버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빅 리그에 남게 된 카이너는 갑자기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였고, 7월 말에는 자신의 전년도 홈런 기록을 넘어섰다. 이후 그와 뉴욕 자이언츠의 1루수 자니 마이즈는 치열한 홈런 경합을 벌였고, 결국 같은 51홈런으로 시즌을 마감하여 공동 홈런왕에 올랐다.

또한 카이너는 이 해에 리그 타율 랭킹에서 4위에 올랐으며, 그의 삼진 수는 전년도에 비해 30개 가까이 감소한 반면 4구가 대폭 늘었다. 그린버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인 결과였다.

이듬해에도 마이즈와 카이너의 홈런 수위 다툼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마이즈가 10월 3일에 40호 홈런을 기록함으로써, 이 두 슬러거는 또다시 타이틀을 공유하게 되었다.

두 선수가 친 홈런 수의 합은 102개에서 80개로 줄었지만, 상황은 전년도와 매우 흡사하였다. 전년도에는 카이너가 51호 홈런을 먼저 기록한 상태에서 마이즈가 막판에 카이너를 따라잡은 바 있다. 그리고 이 해부터 카이너의 선구안을 문제삼는 전문가는 전혀 없게 되었다.

1949년, 카이너는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는 핵 윌슨이 가지고 있던 내셔널 리그 시즌 최다 홈런 기록에 단 2개 모자란 54홈런으로 시즌을 마감하여 홈런왕 4연패를 기록하였으며, 127타점을 올려 이 부문에서도 타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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