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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은 좋은데 행정은 이상주의, 큰 그림 안 보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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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호 04면

18일 오후 2시 서울시의회 임시회 개회식장.
허광태(민주통합당) 의장이 같은 당 소속 박원순 서울시장을 향해 날 선 몇 마디를 던졌다. “정책을 입안·실행하는 데 있어서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고래쇼 중단 같은 일은 명분에만 집착하고 실리를 잃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텃밭 가꾸기 사업도 소통 부족이 염려되고, 토목 사업도 너무 위축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박원순 서울시장 6개월 성적표

표현은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시장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서울시의회는 민주당이 다수당이다. 전체 114석 중 78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의석 분포 때문에 전임 오세훈(옛 한나라당) 시장은 의회의 제동으로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정책 추진에 무지 애를 먹었다. 지금 시의회는 친 박 시장 분위기가 주류다. 하지만 최근 이런 기류에 변화의 조짐이 엿보인다. 지역을 챙겨야 하는 시의원들이 부동산과 각종 개발 사업을 억누르려는 시장의 정책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이날 허 의장의 작심 발언은 시의원들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소통도 좋지만 지역주민들의 민원에 좀 더 귀를 열라는 요구다.

“모든 소통은 습관이자 애정입니다. 구호는 안 돼에에~ 현장 최우선의 원칙으로 모든 채널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SNS 노하우요? 최대 140바이트를 넘지 않는 것.” 지난 1월 29일 박 시장이 자신의 트위터에 밝힌 140자 소통론이다. 그는 소통에 능하다. 이는 그의 꾸준한 포스팅에서 비롯된다. 사진은 가끔 수행비서가 찍어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직접 올린다. 박 시장의 트위터 팔로어(follower)는 21일 현재 42만2064명, 페이스북을 받아 보는 네티즌은 5만4067명에 달한다.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는 박원순 식 소통은 강점이 많다. 서울에 갑작스러운 폭설이 내린 지난 1월의 일이다. 휴가 중이었던 박 시장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서울시민에게 ‘내 집 앞 눈 치우기’ 등을 당부했다. 시청의 공조직을 가동한 동시에 이뤄진 일이다. 그의 글은 위력을 발휘했고 포스팅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계급장 뗀’ 소통이 부작용 빚기도
이런 소통의 달인이 의장으로부터 불소통을 지적당한 것이다. 이는 소통 자체보다는 방향성에서 비롯된 문제로 풀이된다. 즉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소통하느냐의 문제다.
토목 관련 부서 공무원 D씨는 최근 시청에서 열린 건축가 김정후씨의 시청 특강을 사례로 들었다. 박 시장이 주선한 특강으로 알려진다. 내용은 생산을 중단한 티센 제철소를 활용해 공원을 만든 독일 뒤스부르크 등을 사례로 들면서 “토목에도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D씨는 “서울엔 유럽과 달리 석조 건물이 별로 없다. 더군다나 새로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꼭 활용할 가치가 있는 시설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실무자들은 캐치프레이즈 제시에 능한 시민단체와 협업에서도 답답함을 호소한다. 자문을 위해 시민단체 사람들과 자주 만난다는 한 과장은 “총론은 이상적이고 그 말대로 할 수만 있다면 유토피아다. 하지만 사업을 집행할 공무원에게 중요한 것은 각론”이라고 말했다.

직원들과의 스스럼없는 소통에서도 부작용이 자주 나타난다. 박 시장은 취임 초기 말단직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며 시스템 구축을 지시했다. 그래서 ‘계급장 떼고’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직원 고충방’이 생겼다. 건설적인 토론의 장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물거품이 됐고 국외 훈련, 후생복지 개선, 출장비 인상 등과 같은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심지어 시장에게 “국외 훈련 영어 성적 점수 기준을 낮춰 달라”고 요구하는 글까지 올라왔다. 고충방이 아니라 민원방이 된 것이다. E과장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해를 앞세우기 마련”이라며 “시민들이 보면 한심해할 개선 요구도 많았다. 소통도 좋지만 균형과 절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절감했다”고 말했다.

업무를 진행하면서 결정이 지연되는 데 대한 공무원들의 불만도 많다. 매년 해 온 행사를 보고하러 들어간 F과장의 이야기다. “간단한 사안인데, 시장께서 갖고 계신 아이디어를 모두 쏟아냈다. 말씀을 들으면서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G과장은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시장께서 자신이 쓴 책을 읽어 보라고 했다. 이후에 다시 들어갔는데 또 한 권의 책을 받았다. 이런저런 책을 많이 권유하신다. 시민 협치 등을 주제로 한 이론서들이었다. 그래서 머리 싸매고 읽긴 했는데 업무에 어떻게 적용할지, 적용이 쉽지도 않고…. 하여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실토했다.

어떤 서울시를 만들겠다는 포부나 구상이 여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김형식(민주통합당) 서울시의원은 “자신의 시대적 과제와 소명을 드러낼 박원순 브랜드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서울시장 박원순이 앞으로 서울시에 어떤 큰 그림을 그릴지 시민 앞에 내놓지 않고 있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박 시장 측은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마을공동체가 얼마나 큰 비전인지 모르고 하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박 시장의 ‘마을공동체’는 사람 냄새 나는 동네 만들기로 요약된다. 서울을 삭막한 대도시에서 주민 참여가 활발한, 골목길 네트워크가 가동되는 ‘마을’로 바꾸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를 만드는 등 올해 1340억원을 들일 예정이다.

하지만 이 비전에 대해 대부분의 전문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서울의 미래 청사진으로 적합한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김태희(민주통합당) 서울시의원은 “마을공동체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만 서울 같은 초대형 도시에서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라며 “굉장히 이상주의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금창호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서울이 서울시민의 삶의 터전이라는 특성도 있지만 글로벌 도시로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며 “한강에 텃밭을 가꾸는 문제로 국토해양부와 충돌도 있었지만 그보다 과연 굳이 그 비싼 땅을 왜 농장으로 이용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그동안 차별화를 내세워 전임 시장들의 정책을 파기하거나 평가하는 일에 몰두한 인상이 짙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유 브랜드는 내놓지 않고 있다. 그간 성과물은 무엇이고, 시가 나아갈 방향이나 목표는 무엇인지, 이런 질문들이 나오면서 박 시장의 고민이 이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시민운동가서 행정가로 무난히 변신 중
시민운동가에서 행정가로 무난히 변신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H과장은 “올 초부터 시장이 많이 달라졌다”고 귀띔했다. 우선 현장을 찾는 횟수를 확 줄였다. 박 시장은 요일별 테마 업무 방식을 도입해 매주 화요일에만 현장을 찾겠다고 발표했다. 현장에 나가면 민원인들의 각종 요구가 빗발치고 시간도 많이 빼앗기게 된다.

사람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하는 말도 신중해졌다. 지난 2월 박 시장은 취임 후 처음으로 서울 25개 구 구청장들과 동시에 만났다. 이 자리에서 민원이 쏟아졌다. 박 시장은 각 사안에 대해 “검토하겠다”고 하거나 배석한 담당자들에게 설명하게 했을 뿐 즉답을 피했다. 취임 초기에 한 구청장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서울시 잘못”이라고 덥석 응답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뤘다. 현장에서 하는 말도 신중해졌다. “당장 고치겠다”는 말 대신 “어려움이 많으시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로 바뀌었다. H과장은 “서울시장의 말이 갖는 무게를 터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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