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는 IT 강자들 1등 안주, 경영진 오판에 몰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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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호 20면

‘위기’란 말을 벗삼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한 것일까. 정보기술(IT) 업계의 판도 변화가 롤러코스터처럼 아찔하다. 핀란드 노키아가 1분기 사상 최악의 실적을 내면서 14년 휴대전화 제왕 자리를 내놨다. 회사채 신용도 투기(정크) 등급 직전까지 강등됐다. 휴대전화와 스마트폰의 원조로 각각 꼽히던 미국 모토로라와 캐나다 림(RIM, 블랙베리 제조사)은 인수합병(M&A) 시장에서 팔려가거나 그 후보로 전락했다. 스마트폰 대결을 펼치는 애플과 삼성전자에 반사이익이 돌아갔다.

삼성전자의 반면교사

1990년대까지 ‘가전 왕국’이던 일본 소니는 2000년대 중반부터 8년 적자의 늪에 빠진 끝에 1분기에 사상 최대 손실을 기록했다. 일본 반도체의 자존심 엘피다는 최근 파산보호(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인터넷 세상에서도 1세대 미 야후가 가라앉고, 미 마이크로소프트가 주춤하는 사이에 구글에 이어 페이스북·트위터 등이 맹위를 떨친다.

삼성전자·애플·구글 등 전성기를 구가하는 회사들조차 방심하지 말자고 스스로 채찍질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21세기 가장 위대한 회사’란 소리를 듣는 애플의 주가가 급락하고 있다. 차세대 혁신제품이 뭐냐를 놓고 회의론이 번지면서 주가가 600달러 밑으로 내려갔다. 지난 10일 장중 644달러 사상 최고가로 6000억 달러를 돌파한 시가총액이 열흘 새 500억 달러나 증발했다. 구글도 개인정보 침해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다음달 미국 나스닥 상장을 앞둔 페이스북도 밀려드는 특허 소송 공세에 곤욕을 치른다. LG경제연구원 이종근 책임연구원은 “소니를 비롯한 전통 강자들이 1등 자리에 안주하며 ‘스마트’ ‘디지털’ ‘모바일’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에 둔감해 위기를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노키아와 소니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때다.

노키아가 19일(현지시간) 내놓은 1분기 실적은 세계 IT 업계에 충격을 줬다. 단말기 판매가 전년 동기 대비 40% 줄어든 42억46000만 유로(약 6조3000억원)로 9억2900만 유로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상대적으로 비싼 스마트폰 판매는 17억 유로(1190만 대)에 불과했다. 스테판 엘롭 최고경영자(CEO)는 “매우 어려운 경영환경에서 변해야 산다”고 경고했다. 앞서 16일 미국의 국제신용평가회사 무디스가 노키아의 투자등급을 최하위(Baa3)로 강등했다. 이 회사가 5분기 연속 적자에 허덕이자 주가는 15년래 최저치로 곤두박질쳤다. 애플이 아이폰을 발매한 2007년에 39.7달러(10월 29일) 최고치까지 오른 뒤 지난 20일 3.7 달러로 마감했다. 4년여 만에 10분의 1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98년 이후 누구도 넘보지 못한 세계 휴대전화 1위 자리도 1분기에 삼성전자(9200만 대 추정)에 넘겨줄 처지다.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지식경제부 R&D전략단의 조신 정보통신투자본부장은 “스마트폰과 개방형 플랫폼이란 글로벌 추세를 외면하고 고유의 독자기술만 고집한 것이 패인”이라고 지적했다. 노키아는 2007년 애플 아이폰으로 촉발된 스마트폰 시대에 둔감했다. 모바일 운영체제(OS)도 주요 단말기 회사들이 구글 ‘안드로이드’를 앞다퉈 도입하는 와중에 자체 개발한 ‘심비안’만을 고집했다. 그 사이 애플과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시장의 양강으로 자리 잡았다.

휴대용 음악재생기 ‘워크맨’ 전설을 일군 소니의 사정도 노키아 못지않다. 지난 12일 도쿄 본사에서 히라이 가즈오(平井一夫·52) 사장은 250여 명의 국내외 기자들 앞에서 새로운 경영비전을 밝혔다. 이달부터 대표이사로 경영전반을 총괄하게 된 그는 “우리에겐 여유가 없다. 위기에 빠진 소니를 부활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지난해 5300억 엔(약 7조원)의 사상 최대 순손실을 고백하는 자리였다. 소니는 가전 명가의 위상을 되찾으려고 모바일·카메라·게임 분야를 3대 핵심사업으로 키우고, TV에서도 옛 명성을 되찾겠다는 포부다. 2007년 최초로 출시했다가 반응이 좋지 않아 접었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사업도 다시 추진한다. 일본 언론은 소니가 대만 AUO와 차세대 OLED TV 개발에 협력한다고 18일 일제히 보도했다. 16여만 명의 직원 중 1만여 명을 감원하는 등 혹심한 인력 구조조정도 진행한다. 소니의 몰락은 2000년대 이후 애플 MP3 플레이어 ‘아이팟’과 삼성전자의 디지털 TV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다. 1등 안주, 관료주의 만연, 창의적 인재의 유출 역시 전문가들이 꼽는 위기 요인이다. 최고경영진의 혜안도 결정적이다. LG경제연구원 이종근 책임연구원은 “카리스마 넘친 모리타 아키오와 이부카 마사루 공동창업자가 90년대에 세상을 떠난 뒤, ‘전자산업의 디지털 컨버전스(융합)’라는 도도한 물결에 대해 경영진이 더디게 반응하면서 위기가 닥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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