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쫀쫀한 인생이 ‘대활’해지는 이 느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7호 27면

헬싱키 시벨리우스 공원의 시벨리우스 두상. 핀란드의 대표적인 여류 조각가 엘라 힐투넨이 1967년 시벨리우스 사후 1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다. [중앙포토]

어머니가 황해도 해주 분인데 이남사람들이 잘 모를 사투리가 꽤 있다. 미련한 행동을 두고 ‘민하다’고 표현하고, ‘아, 저…’쯤에 해당될 애매한 간투사로는 ‘거시거니스끼’라고 한다. ‘페안도(평안도)’ 출신 아버지가 ‘기리니끼니(그러니까)’ 하고 말을 펼치면 ‘거시거니스끼’ 하면서 부인이 받는 식. 그중에 어릴 적 야단맞으면서 하도 많이 들은 터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가 있다. ‘대활’이다. “넌 아이가 왜 그리 대활하지 못하냐!” 이런 식으로 사용된다. 혹시 한자가 있다면 트일 활을 써 ‘大闊’이 아닐까. 절대로 칭찬을 하지 않는 성격의 부모 앞에서 나는 언제나 민하고 대활하지 못한 어린이였다. 지금도 횟집의 ‘활어’라는 글자를 보면 곧장 대활이 떠올라 왕창 스트레스를 받는다(기억을 더듬어 보니 정말로 단 한번도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북사람들의 습성일까. 나 역시 아들에게 대놓고 칭찬한 기억이 없다).

詩人의 음악 읽기 시벨리우스 교향곡 2·7번

갑자기 시벨리우스 음악이 듣고 싶어 음반을 찾다가 대활이 떠올랐다. 그의 음악, 특히 일곱 곡의 교향곡은 참으로 드넓게 트여 있고 수수하면서도 강인하고 장엄하다. 대활한 것이다. 어디 가서 시벨리우스는 대활한 작곡가입니다고 말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겠지? 여기에 더해 로맨틱한 우수를 빼놓을 수 없다. 교향시 핀란디아의 유명세로 인해 애국애족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인물이지만 그 음악에 짙게 배어 있는 정조는 느슨한 아픔으로 다가오는 페이소스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과는 아주 다른 것인데 느슨한 아픔, 느슨한 슬픔 같은 표현이 전달되려나.

물경 92세를 살았던 시벨리우스는 1957년에 세상을 떠났다.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제7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나서 장장 32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 갔다. 양자인 유시 알라스의 증언에 따르면 언제나 늘 작품을 쓰고 있었다고 하는데 발표를 하지 않았다. 유품에 악보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봐 본인이 태워 버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작품 이전에 사람이 멋진 경우가 시벨리우스라는 인물이다. 그는 북구의 광활함, 담대함, 굳은 의지, 그러면서도 서정적 감성을 모두 품어 안은 멋진 예술가가 아닌가 싶다.

교향곡 모두를 절창으로 볼 만하지만 특히 애착이 가는 것이 제2번이다. 현의 스타카토와 더불어 서늘하게 진행되는 도입부가 일품인데 그의 작품으로 가장 인기 있는 곡이다. 이 인상적인 첫 대목에서 나는 스산한 한기를 느끼곤 하는데 어떤 사람은 오히려 따뜻함을 느낀다고도 한다. 오보에와 클라리넷의 목가적인 선율. 이어서 음반 뒷면의 해설을 약간 표절해 인용하자면 ‘끝없이 펼쳐진 핀란드의 검은 숲과 신비로운 호수의 정경이 신기루처럼 떠오른다’는 2악장이, 그리고 거친 금관악기가 질풍처럼 포효하는 3악장, 압도적인 고조감으로 펼쳐지는 4악장 코다로 끝맺는다. 1902년,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돌아온 37세 청년 시벨리우스의 패기와 내면성이 담뿍 담겨 있다. 사적으로 즐기는 것 못지않게 이 곡은 내 작업실 방문객들 접대용 음악으로 많이 활용한다. 그만큼 보편적 호소력이 있는 것이다.

바르비롤리가 로얄 필을 지휘한 교향곡 2번. 이사람의 시벨리우스도 명연주로 꼽힌다.

시벨리우스 교향곡으로 또 하나 높이 평가할 것이 제7번이다. 22분 정도 되는 단악장 구성이어서 혹시 더 큰 구상의 일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교향시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알 수 없는 까닭으로 더 이상의 교향곡은 생산되지 않았다. 제7번도 다른 작품과 구성상 큰 차이는 없지만 특별히 목관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북유럽의 자연을 사랑하고 예찬했던 작곡가의 마음이 목관의 온기를 통해 전해져 오는 느낌이다.

시벨리우스의 나라 핀란드에 가 보지 못한 대신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을 봤다. 느닷없는 충동으로 머나먼 핀란드를 찾아가 식당을 열고 살아가는 세 일본 여인의 이야기인데 어떤 풍경화보다 그 정경이 예쁘게 그려진다. 삶은 카모메(갈매기) 식당 같은 동화가 아니다. 하지만 동화를 벗어나 ‘대활하게’ 살아본들 뭐 그리 행복하단 말인가. 내 비록 대활하지 못해 쫀쫀한 일생을 기신기신 살고 있지만, 카모메 식당 같은 작업실 줄라이홀에 틀어박혀 하루하루 살지만, 그것도 한 인생이다. 어머니는 제발 더 이상 아들을 야단치지 마시라. 대활하지 못한 대신 대활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가까이하고 있지 않은가. 대활, 활어회, 여든이 넘은 어머니. 뭔가 물컹하게 슬프네.

좋은 연주로는 오코 카무, 사카리 오라모 같은 핀란드 출신 지휘자본을 높이 치는데 내 경험으로는 카라얀 전집본이 가장 낫다고 본다. 감흥을 극대화하는 카라얀 특유의 재주가 시벨리우스에서는 장점으로 발휘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