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이 꼭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64년 전인 1948년 7월 29일. 그때도 런던에선 여름 올림픽 개막식이 열렸다.
뒷날 웸블리구장으로 이름이 바뀌는 엠파이어스타디움에서 태극기를 든 대한민국 선수단 기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 시상대에 올라야 했던 손기정(당시는 트레이너)이었다.
개막 D-100일이던 그해 4월 20일 신문 지상엔 ‘올림픽후원권 당첨번호’를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국민소득 350달러이던 빈국 국민은 한 장에 100원인 후원권을 사서 선수단 경비를 마련했다. 이렇게 모인 8만 달러로 임원 15명, 선수 52명의 선수단은 런던으로 떠날 수 있었다. 지금 가치로는 약 8억8000만원이다.
2012년 선수단 본진은 7월 20일께 국적기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직항편으로 런던으로 향한다. 비행 시간은 10~12시간 남짓. 48년엔 18일이 걸렸다. 6월 21일 서울역을 출발해 부산역에 도착한 뒤 23일 일본 후쿠오카행 여객선을 탔다. 요코하마에서 다시 배편으로 상하이·홍콩으로 이동했고 홍콩에서 7개 도시를 경유해 7월 8일에야 런던에 도착했다. 선수단이 서울역에서 탑승한 객차는 일제가 1940년 도쿄 올림픽(중일전쟁으로 취소)을 위해 제작한 특별 차량이었다.
48년 올림픽의 별명은 ‘검약 올림픽’.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가시지 않아 영국도 배급제를 실시하던 때였다. 한국 선수단 숙소는 공군부대 막사와 한 초등학교 건물이었다. 식사는 현지에서 고용한 중국인 요리사 두 명에게 맡겼다. 2012년 한국 선수단은 침대 1만7320개 규모의 대형 선수촌에 입촌한다. 김영찬 대한체육회 국제경기팀 과장은 “입촌 전 런던 훈련캠프에는 영양사 10명을 대동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첫 출전한 올림픽에서 역도 미들급의 김성집과 복싱 플라이급의 한수안이 동메달 하나씩을 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국기’ 마라톤에서 홍종오가 25위, 서윤복이 27위, 최윤칠이 기권에 그친 건 국민적인 충격이었다.
스웨덴과의 8강전에서 0-12로 참패한 축구 대표팀의 정남식(2005년 작고)은 생전에 아들 정환종(61)씨에게 “우리 실력이 아시아 최고라고 자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네 골을 내 준 스웨덴의 군나르 노르달(이탈리아 세리에A 통산득점 2위)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350여 명 규모의 대한민국 선수단은 금메달 10개, 10위 내 성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올림픽에서 한국 스포츠는 더 커지고 당당해졌다. 그 출발은 겨울 옷감으로 단복을 맞춰야 했던 48년의 런던 대회였다.
최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