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음악이 하나로 어우러진 정재(呈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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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전목단' '춘앵전' '장생보연지무' '처용무' …. 궁중무용, 즉 정재(呈才)의 종류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정재는 궁중 및 지방관아의 공식 연회에서 연행된 춤을 가리킨다. 잔치에서 추는 정재는 문묘·종묘 등 제향에서 추는 춤인 일무(佾舞)와 구별된다.

음악과 춤은 본래 분화되지 않고 한데 어우러진 종합적인 형태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음악의 범주에는 춤 뿐만 아니라 연희까지 포함됐다.

고구려 안악고분 후실벽화에서 현악기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나, 우륵이 신라로 망명해 그의 제자들에게 전수한 가야금 음악, 세종 때 창제된 봉래의는 모두 악가무(樂歌舞)일체를 말해준다.

이때 음악은 대부분 성악을 동반하는 기악곡이었다.

"우아한 음악이 미려(美麗)한 경치 속에 울려나는데 기동(妓童)은 향기 풍기는 층뜰에 떼지어 늘어서서 다투어 아리따운 자태를 드러내고 함께 덩실거리는 춤을 바치옵니다"라고 부르는 창사(唱詞)를 곁들였다.

정재는 기녀들이나 어린 남자아이들도 추었다.

허균은 처용무를 이렇게 시로 묘사했다.

"채아(彩娥)가 뛰어나와 서로 짝하여 춤추다가 수놓은 적삼을 입은 이가 처용을 끌고 오네. "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김창하(金昌河)는 순조대의 음악가 겸 무용가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익종(효명세자)이 대리청정하던 1827~29년 부왕인 순조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세 차례나 궁중 연향을 베풀었다.

이때 김창하의 도움을 받아 정재를 창작하거나 규모를 더욱 키웠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정재들도 화려하게 장식했다.

궁중 정재 중 일부는 지방에서 연행되었던 것을 재편한 것도 있고, 그 반대로 궁중의 것이 지방으로 전파된 것도 있다.

검무(劍舞)는 궁정과 지방의 잔치에서 널리 추었던 춤이다.

박제가(朴齊家)가 묘향산을 기행하던 중 절방 안에서 검무(劍舞)를 완상하고 이렇게 그 춤사위를 묘사했다.

"기생 둘이 검무를 춘다. 융복(戎服)을 입고, 전립(氈笠)을 쓰고, 잠시 절하고 빙 돌아 마주 선 채 천천히 일어난다. 귀밑머리 쓸어 올리고 옷깃을 여민다. 버선발 가만히 들어 치마를 툭 차더니 소매를 치켜든다. 춤이 막 빨라져서 손이 칼끝을 흔드는가 하면 훌쩍 일어나자 검은 간 데 없다. 머리를 치켜들고 던진 쌍검이 서리처럼 떨어지는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공중에서 앗아간다."

지난 15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1829년에 베푼 진찬의(進饌儀·궁중연회)가 재현됐고 오늘(28일)은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김창하의 안무를 재현하는 무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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