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비판에서 생활풍습까지 그려낸 만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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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지하철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물론이고,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까지도 만화책을 읽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잖습니까. 만화책이 아니라 해도 스포츠신문에 실린 만화에 코를 박는 어른들의 모습이 이제는 조금도 생소하지 않습니다.

'쥐'(아트 슈피겔만 지음, 아름드리미디어)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참혹한 학살과 그 고난 속에 살아가는 유태인의 비극을 다룬 만화책이지요. 만화로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책이기도 합니다. 유태인을 쥐로, 나치를 고양이로 표현한 이 만화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일본 만화 류에 길들여 있는 우리네 풍토에 매우 생소한 만화입니다.

하지만 차분히 읽어가면 만화라는 장르가 가지는 힘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감동적인 만화입니다. 만화가 이렇게 지어질 수도 있고, 또 만화가 가야 할 방향을 웅변으로 가르쳐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만화입니다. 우리 만화계에 각성을 촉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더군요.

만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흔적이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는 우리네 풍토에서 '오노레 도미에'라는 만화작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영남대 법대 교수이면서 지난 해 '내 친구 빈센트'(박홍규 지음, 소나무 펴냄)라는 책을 써내기도 했던 박홍규 님이 이번에는 바로 그 오노레 도미에에 관한 책, '오노레 도미에-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박홍규 지음, 소나무 펴냄)을 써냈습니다.

오노레 도미에는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만화 작가이지요. 그는 철저한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당시 사회 현상들을 날카롭게 풍자한 만화를 그려낸 만화의 아버지이며 사실주의 화가로도 이름이 높은 화가이기도 하지요.

박홍규 님은 도미에를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만화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신은 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만화를 좋아하는데, "허황된 영웅주의적 폭력물이나 스포츠물, 또는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시대물, 그리고 말초신경과 눈물샘을 최대한 자극하는 순정물과 섹스물 일색인 만화"(이 책 6쪽에서)는 싫어한다고 전제합니다.

나아가 "그것도 예술이라고 당당히 자부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같은 쪽에서)이라고 선언합니다. '만화는 어디까지나 아이러니와 풍자, 경고, 비판이 없으면 안 된다. 그것이 없는 것은 그냥 그림이지 만화가 아니다'고 한 일본의 만화가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에 대한 정의를 따르지요.

그같은 정의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만화작가 도미에를 이끌어냅니다. 도미에는 20대에 정치풍자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 약 4천 점의 만화를 그렸답니다. 이 책 안에는 도미에의 만화가 여러 점 수록돼 있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만화의 주인공이 주로 서민들이었으며, 정치권력을 소재로 할 때에도 결코 권력의 편에 서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도미에는 결국 그가 활동하던 때에 민중의 눈과 귀가 되어 권력을 비판하고, 아직은 문맹률이 높던 당시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처음에 정치풍자 만화를 그리던 그는 1835년 신문 사전 검열제를 부활시킨 '9월법'이 완성된 이후로 정치풍자 만화를 그리기 어려워지자, 마침내 풍속 만화를 그리게 되지요.

"풍속 비판은 정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친근한 서민 생활을 풍자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정치의 토대가 되는 생활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정치르 풍자하는 것이다."(이 책 117쪽에서)

20대 후반, 피가 끓는 도미에의 권력에 대한 분노는 어떤 압제로도 가라앉힐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가 민중의 풍속을 그렸다고 해서 무조건 미화하는 식의 '민중주의'는 아닙니다. 민중의 아름다움과 추악함, 진보적인 면과 보수적인 면, 선과 악을 모두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이며, 인간다움이란 대관절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지요.

이쯤 되면 도미에의 만화가 요즘 우리네가 보는 상업 만화와는 차원이 다른 만화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습니다. 여자의 공중목욕탕을 엿보는 남자들에서부터 아내에게 쥐어터지는 남편, 어머니를 살해하는 아들 같은 생활 풍습에서부터 폭동과 반란 등에 이르기까지 만화라는 장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작품 안에 담으려 했던 것이지요. 치열한 삶과 만화 속에 그 치열함을 그대로 담으려 애썼던 19세기 만화가의 삶과 작품을 바라보면서 21세기의 우리는 우리 시대를 반성하고, 우리 만화 작품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 이 글에서 함께 이야기한 책들
'쥐'(아트 슈피겔만 지음, 아름드리미디어)
'내 친구 빈센트'(박홍규 지음, 소나무 펴냄)
'오노레 도미에'(박홍규 지음, 소나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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