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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에도 로맨스는 흐른다

중앙일보

입력

테헤란로 한복판, 역삼동을 걷는다. 좌우로 높은 건물들이 숨막히게 들어차 있고 그 좁은 틈을 비집고 하늘로 철근이 또 솟아오른다. 가장 변화무쌍하고 치열한 거리 테헤란로. 그 중심에 역삼동이 있다. 그렇지만 테헤란로의 화려함을 한겹 벗겨내보면 역삼동에도 사람사는 맛이 나는 곳들이 숨어있다. 숨겨진 곳 어딘가에 다정한 찻집과 음식점이 있고 그곳을 찾는 정겨운 사람들도 있다.

겨울이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까 아무래도 야외에서 돌아다니는 게 수월치 않다. 이번주에도 선릉역의 선정릉을 데이트 스케줄에 포함시키고 싶었으나 직접 가보니 이거... 고개를 절레절레. 그래서 뺀다.

아무래도 겨울 데이트는 따뜻한 실내공간을 연결연결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겨울 레포츠 데이트 정도. 눈썰매·스케이트·스키같은 것. 생각하자니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하군.

어쨌든 오늘 데이트 시작합니다.

13:00 2호선 역삼역 3번 출구

앞에서 만나면 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역삼역 구내가 공사중이라 1·2번 출구쪽과 3번 출구쪽이 지하에서 연결돼 있지 않다는 거다. 열차에서 내릴 때부터 3번쪽에 있는 개찰구로 나가야 3번 출구로 빠져나올 수 있다. 만약 사당방향에서 온 사람이라면 열차의 꼬리쪽 '나가는 곳'으로 나와야 하고 삼성방향에서 온 사람은 열차의 머리쪽 '나가는 곳'을 이용.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거나 '에이, 가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역삼역에 도착했는데 진짜 3번 출구는 못 찾겠더라 하시는 분은 그냥 2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만 걸으면 된다. 한솔빌딩만 찾으면 되니까 어렵지도 않다. 별 것도 아닌 걸 갖고 괜히 오래 떠든 느낌이군 웬지.

13:00 - 14:00 따끈따끈 옹기솥밥

먼저 한솔빌딩을 찾는다. 그러면 그 옆의 광주은행도 덩달아 찾을 수 있을 것. 광주은행과 포스틸 사옥공사현장 사이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다보면 주변에 온통 카센타가 있다. 오늘은 자동차 정비를 배우며 데이트를 하느냐고? 우헤헤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가 과연 있을까? 있지도 않을테니 대답 안 하고 그냥 넘어간다.

100미터쯤 들어가다보면 오른쪽에 '화롯가 이야기'라는 기둥형 간판이 보인다. 오늘 점심은 여기서. 간혹 TV 드라마에서 군밤 등을 구워먹는 장면에 등장하는 화로를 아는가? 이 집은 전통 화로를 특별제작, 거기에 석쇠를 얹고 고기를 구워먹는 집이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가시면 옛날 생각 새록새록 나실 만한 집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가난하고 젊은 연인이므로 고기는 꿈도 못 꾼다. (T_T) 이집에서 점심에 제일 잘 팔린다는 '옹기솥밥'을 먹는다. 한사람 한사람 옹기 하나씩 즉석에서 밥을 지어 내주는데 갖은 나물로 비벼 먹을 수 있게 푸짐한 나물이 곁들여 나온다. 옹기밥을 나물 담긴 대접에 쓱 덜어내서 고추장 한숟갈 퍼넣고 썩썩 비벼먹는다.

물론 어느 솥밥집이나 그렇듯이 눌은 밥에 미리 물을 부어놓아, 비빔밥을 먹은 후에 구수한 숭늉을 후식삼아 먹는 것은 당연한 수순.

아쉬운 것은, 가게 이름도 '화롯가 이야기'고 식당의 컨셉(?)도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어쩌구인데 비해 규모와 전체적인 분위기는 너무 대형식당같다는 점이다. 조금 더 아기자기하게 만들어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도 맛이나 가격이나 나무랄 데 없으니 됐지 뭐.

14:00 - 14:40 그리니치에서 마시는 영국 홍차

화롯가 이야기에서 천천히 눌은밥과 숭늉까지 포식한 후 다시 큰 길로 나온다. 한솔빌딩과 공사중인 현대산업개발 건물을 지나쳐 지하도를 건넌다. 역삼역 2번 출구로 들어가 1번 출구로 나오는 셈.

지하도를 빠져나오면 왼편에 금융결제원 건물이 있다. 이 건물과 그 옆 아시아빌딩 사이에 위치한 골목이라기에는 꽤 넓은 길로 들어선다. 저기 10여미터 앞에 '그리니치(GREENWICH)'라는 아담한 카페가 있다.

이 찻집은 영국의 서민층에서 쓰던 고가구를 직접 사다가 내부를 꾸몄다. 그래서인지 영국 어느 해안도시의 소박한 카페에서 홍차를 마시는 기분이 난다. (솔직히 말하면... 영국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확실히는 모른다.) 어느 카페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티백 홍차는 취급하지 않는다. 찻잎을 제대로 우려내 마신다.

'그리니치'라는 이름은 40대 후반의 주인이 영국여행중 가장 마음에 남았던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 그리니치에는 세계 표준시로 유명한 천문대가 있다. 실제로는 아주 작고 조용한 항구도시라고 하는데 그래도 '세계 중심'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도시다. 자신들의 전통과 생활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리니치 사람들. 이 카페는 그런 그리니치의 마음을 가득 담고 있다. 마루도 새로 깐 것이 아니라 옛 고옥에서 나온 기둥을 재활용해 판자로 제재해 깔았고 고가구들도 서민들이 대를 물려 쓰던 것을 가져다 놓았다.

잉글리쉬 블랙퍼스트와 아이리쉬 크림, 애프터눈 등의 홍차를 마시며 잠시 서울이라는 공간을 잊어도 좋을 것 같다.

14:40 - 17:00 브로드웨이의 전설 All That Jazz

차 한잔으로 추위를 달랜 후, 놓치면 아까운 뮤지컬 'All That Jazz'를 보러가자. 다시 역삼역 지하보도로 들어가 6·7번 출구 방향으로 나간다. 나가다보면 LG강남타워·아트센터로 가는 연결통로를 찾을 수 있다. 통로를 따라 가면 LG강남타워 지하 식당가가 나온다. 갈림길마다 아트센터 가는 길이 표시돼 있어서 초등학생도 찾아갈 수 있다.

뮤지컬 'All That Jazz'는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전설, 밥 포시(Bob Fosse·1927~1987)의 삶과 노래를 다룬 작품. 포시는 1972년 한 해에 토니상·아카데미상·에미상을 모두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운 뮤지컬계의 천재. '올 댓 재즈'는 포시의 대표작들을 한 데 모아 집대성한 공연으로, 이번 무대에서 그의 노래와 춤 모두를 한번에 볼 수 있다.

각종 일간지의 리뷰 기사를 참조하시고 예매도 하시고 즐거운 관람 하시길.

22일부터 뮤지컬 '올 댓 재즈' - 중앙일보 11월 14일
'포시 스타일' 국내 첫 나들이 - 조선일보 11월 6일
올 댓 재즈 '브로드웨이의 전설'을 그린 춤무대 - 동아일보 11월 12일

17:00 - 18:00 간단한 갈비탕으로 이른 저녁식사

올댓재즈의 흥취에 젖어 그/그녀와 당신을 어쩌면 아무 말없이 흐뭇한 얼굴로 길에 나섰을지 모른다. 날씨는 쌀쌀하고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하다. 갈비탕은 어떨까?

LG아트센터에서 논현동 차병원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자. 200미터쯤 내려오면 오른쪽에 '초막집' 간판이 보인다. 이 집은 수입 안창살 구이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이름난 집이다. 이 집의 갈비탕도 그 맛이 빠지지 않는다. 오늘 저녁은 갈비탕으로 하자.

갈비탕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정말 끝내주는 갈비탕'이라는 건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집도 그렇게 침흘려가며 국물 한방울까지 핥을 만큼 죽이는 갈비탕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대로 만든 갈비탕이다.

이집에서 가장 인정해줄 만한 부분은 갈비탕 맛보다는 서비스다. 본 기자가 가본 갈비탕집 중 정말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당이다. 대개 고깃집에서 갈비탕 한그릇만 시키면 약간은 눈치주고 조금은 박대하고 그러기 마련인데 초막집은 그렇지 않다. 갈비탕 한그릇에도 최고의 정성을 다한다. 얼마전 초막집을 찾은 기자. 식사가 나오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더니 여섯번 이상 사과를 했다. 또 사과하고 또 사과하고 또 사과하고... 오히려 한마디 한 본 기자가 민망해서 "아 괜찮습니다"를 연발해야 했으니 그 서비스 정신을 알아줄 만 하다.

맛도 어느 유명 갈비탕집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 갈비탕은 매일 50그릇 한정판매를 한다는 거다. 운이 나쁘면 저녁때는 갈비탕이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 그래도 토요일이라 점심손님이 좀 적지 않을까 하는 점에 기대는 걸어보지만 어쩌면 갈비탕은 제공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갈비 김치찌개를 먹으면 된다. 김치찌개 맛도 고깃집에서 나오는 것 치고는 꽤 괜찮다.

갈비탕이 안 된다고 해도 그 서비스만으로 별 다섯개는 주고 싶은 집이니 한번 찾아보시라.

18:00 - 20:00 겨울 스포츠 스케이트

오늘 너무 가만가만 앉아있는 데이트만 했지? 이제 좀 땀흘려가며 몸을 풀 만한 스케줄을 하나 제시한다. 역삼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으로 향하자. 롯데월드 가는 것은 아니고, 그 아래층의 아이스링크를 간다.

스케이트 타는 것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있겠지만 스케이트만큼 커플이 즐기기에 좋은 스포츠가 없다. 지난 목동편에서도 한번 다뤘는데 이번에는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제대로 고른 스케줄이다. 사계절 언제 즐겨도 좋은 스포츠, 둘이 나란히 손잡고 적당히 스킨십의 기회도 노리며 행복해할 수 있는 스포츠, 바로 스케이트다.

아무래도 겨울이라 다른 철보다는 사람이 좀 많지만 그래도 저녁시간이니 한낮보다는 링크가 한가하다. 천천히 링크를 돌면서 얘기도 하고 반드시 손잡고 타자. 한발 한발 스케이트장을 돌다보면 땀도 나고 웃음도 나오고. 행복한 시간이다.

20:00 - 맛난 전통술. 배상면주가

언제나 그렇듯 오후 여덟시 이후의 스케줄은 당신과 그/그녀 마음대로니 그냥 집으로 향해도 별 불만은 없다. 아니면 잠실역 어딘가에서 가볍게 차 한잔이나 술 한잔도 좋겠지.

그렇지만 본기자라면 다시 역삼동으로 돌아와 차병원 옆에 있는 '배상면주가'에 가겠다. 오늘은 역삼동을 메인 스트리트로 삼은 날이니만큼 마지막 정리도 역삼동에서 해야 되지 않을까? 헤헤헤. '초막집'에서 차병원쪽으로 30미터 정도만 내려오면 오른쪽에 '배상면주가'가 있다.

이 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통주점'의 틀을 깬 집이다. 시원한 통유리와 깔끔한 인테리어가 자랑거리. 은은한 향도 피워놓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일관된 컨셉으로 전통 한옥의 분위기를 살렸다. '그림자벽'도 꾸며놓아 '달빛 아래 자연과 더불어 한잔 하는' 두보의 기분에 젖을 수 있다. 술의 발효제인 누룩의 색을 기본으로 해서 전체적으로 베이지색톤의 편안한 분위기다.

몸에 좋은 한약재를 넣은 갖가지 술을 시음해 볼 수도 있다. 찹쌀과 누룩만으로 빚은 백하주, 구기자·복령·천궁·인삼 등 열여덟가지 한양재를 넣은 활인18품, 고혈압 기능성주인 천대홍주, 독특한 과실향을 내는 흑미주, 식욕을 돋구고 소화를 돕는 산사춘 등 다섯가지를 시음한 후에 맘에 드는 것을 주문하면 된다.

한달에 두번씩 타악기 정기공연도 있어서 다른 볼거리까지 제공하는 새로운 전통주점이다. 그/그녀와 함께 가면 "이런 데를 어떻게 알았어?" 얘기 한번 듣고 우쭐한 기분을 맛볼 수 있는 술집.

〈Note〉

오늘 데이트는 어떠셨는지요. 너무 평범하다구요? 하긴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평범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매주 데이트 하고 사랑하고 살아가고 한다는 게 사실 알고보면 다 평범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변명도 그럴듯하게 잘 갖다붙인다고요? 헤헤헤. 그게 원래 제 특기 아닙니까.

겨울 데이트는 어떻게 새롭게 쓰기가 힘드네요. 좋은 아이디어 있으신 분은 좀 알려주세요. 본격적으로 스키장 오픈하면 스키장 특집으로 몇주 꾸며보지요. 스키장 주변 맛집, 가는 길, 즐길 거리 등등을 담아서. 그러면 전 취재를 스키장으로 가나요? 놀면서 취재하고 그거 좋겠네요 흐흐흐. 아마 저희 윗분들은 "무슨 소리야!! 주말에 해 주말에!!" 그러시겠죠?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항상 행복데이트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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