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3년전 1997년 11월 21일]

중앙일보

입력

1997년 11월의 상황은 절박했다.

헤지펀드의 공격으로 촉발된 태국 등 동남아 국가들의 통화 위기 여파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 투자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외환당국은 하루하루 국가 부도 위기와 싸우고 있었다.

이미 우리나라는 97년 1월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삼미.진로.해태.뉴코아.기아그룹 등이 줄줄이 부도 처리되거나 부도유예협약을 적용받으면서 금융기관의 부실 규모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던 상태였다.

96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적자는 90년대 들어 가장 큰 규모인 2백30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강경식 부총리가 이끌던 당시 경제팀은 "한국 경제는 기초(fundamental)가 튼튼하다" 는 설명만을 되풀이했다.

11월 5일 미국 경제통신사 블룸버그가 "한국도 곧 태국과 인도네시아처럼 심각한 금융위기에 봉착, 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을지도 모른다" 고 보도한 뒤 외국계 자금의 한국 탈출이 본격화했다.

11월 10일 원화의 대미 달러 환율이 달러당 1천원을 넘어선 뒤 수직 상승했다. 외환보유액은 무섭게 줄어들어 11월 말에는 72억6천만달러까지 쪼그라들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11월 들어서야 외환위기 가능성을 보고받았다. 정부는 비밀리에 미셸 캉드쉬 IMF 총재를 서울로 불러 자금지원을 협의하는 등 나름대로 위기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실제 구제금융 신청은 11월 18일 개각으로 임창열 부총리가 임명된 뒤에야 본격화했다.

林부총리는 그나마 사흘이 지난 11월 21일 밤에야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공식 발표하는 바람에 정권교체 후 실시된 청문회에서 姜부총리와 '인수인계'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