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위크]대중의 시선 사로잡은 뜨거운 입맞춤

중앙일보

입력

미국 언론과 국민은 앨 고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8월 전당대회를 1주일 앞두고 조 리버먼을 러닝메이트로 발표한 것이 선거운동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정한 방향전환은 그보다 일찍, 고어가 노련한 민주당 인사 2명을 참모로 기용하면서 시작됐다. 빌 데일리 前 상무장관과 여론조사 전문가 스탠리 그린버그가 그들이다.

그들은 고어의 선거운동에 부족한 질서와 비전을 부여했다. 평소 일찍 잠자리에 드는 데일리는 6월 15일 0시 15분 고어의 전화를 받았다. 고어는 그에게 지지부진한 선거운동의 지휘봉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데일리가 다음날 만나 커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자고 하자 고어는 “지금 당장 그 커피를 마시자”고 대답했다. 약 45분 뒤 데일리는 토니 쿠엘로의 후임으로 고어의 선거운동 본부장직을 수락했다.

'빌리' 데일리는 20여 년 동안 시카고 시장을 지낸 리처드 J. 데일리의 막내 아들로 언젠가 한 기자에게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모든 사람이 그분 그늘에 가려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데일리는 그 그늘에서 성공의 비결을 배웠다.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온화하지만 예리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귀는 열고 입은 다물라’는 어머니의 지혜와 ‘작은 일을 맡으면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아버지의 신중함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데일리는 1989년 형 리치가 시카고 시장에 출마했을 때 막후에서 도와 당선에 일조했고 1992년 대통령 선거 때도 빌 클린턴이 일리노이州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데일리는 그 보상으로 클린턴 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클린턴이 여성과 소수민족을 기용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심고 싶어했기 때문에 백인인 그는 5년 후에야 내각에 들어갔다.

고어의 선거운동 본부장직에 어떤 희생이 따를지 잘 알고 있었던 데일리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1999년 봄에는 거절당하리라 짐작한 고어가 아예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케 피해갔지만 올 여름 정말로 다급해진 고어가 기댈 사람이라고는 데일리밖에 없었다.

데일리는 감정적 성격으로 사람들을 분열시켰던 쿠엘로보다 안정된 참모였다. 지난 6월 데일리에게 선거운동 본부장직을 넘길 당시 쿠엘로는 보수가 터무니없이 높은 고문들을 해고하는 골치 아픈 일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는 데일리에게 “그 일은 이미 끝냈으니 악역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데일리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자존심을 누른 채 교만한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한 그였다. 밥 슈럼·카터 에스큐 등 말재주가 좋은 미디어 담당 보좌관들에게 질질 끌려다니지도 않았지만 그들과 맞설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는 레이건 정부와 부시 정부 때 백악관과 내각에서 일했던 휴스턴의 부유한 변호사 짐 베이커와 흡사했다. 베이커와 데일리 같은 관리자들은 아랫사람들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가게 하는 능력을 지닌 것 같았다.

스탠리 그린버그는 7월 고어 진영에 합류했지만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삐걱거리기 일쑤인 고어 진영의 여론조사 담당자가 또다시 바뀐 정도로만 보였다. 그러나 그린버그는 고어의 선거운동을 이상적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고어가 구식 인기영합주의자와 ‘새로운 민주당원’ 사이에서 위상 정립을 못하던 이전의 선거운동에 비해 초점이 잘 맞춰진 것이다.

그린버그는 1992년 클린턴의 선거운동 당시 1980년대에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레이건을 지지한 흑인 블루칼라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되찾는 방법을 찾아내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94년 의회 선거에서 하원 다수당 자리를 공화당에 빼앗긴 뒤 문책을 당했고, 1996년 클린턴의 재선 선거운동에서는 수완 좋은 마크 펜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잃었다. 그린버그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이스라엘의 에후드 바라크 등 해외의 중도좌파 총리 후보들에게도 조언을 함으로써 당선에 일조했다.

밥 슈럼은 그린버그에게 주제가 없는 고어의 선거운동에 거시적 안목을 지닌 여론조사자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역별 공략에만 집착하지 않고 선거운동에 일관된 주제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부인과 함께 이탈리아로 휴가여행을 떠날 참이었던 그린버그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조사자료를 검토한 후 선거운동 방향을 잡아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7월 마지막 화요일 그린버그는 조지타운 위스콘신街에 있는 슈럼의 사무실로 갔다. 그 자리에는 슈럼과 데일리, 그리고 에스큐가 참석했다. 고어의 고위 보좌관 태드 디바인은 내슈빌에서 전화로 회의 내용을 청취했다. 그린버그는 고어 진영에서 그때쯤은 분명히 파악하고 있어야 할 사항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반 유권자들은 앨 고어가 클린턴 정부의 2인자라는 사실 외에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린버그는 유권자들이 고어의 배경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았을 때 지지도가 17% 포인트 뛰어올랐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부시 후보는 정치가문 출신에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부각돼 왔다. 그린버그는 유권자들이 ‘정치가문의 자손은 정직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정직하게 드러내고 정치적 야망을 성취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권력이나 돈을 위해 정치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권자들은 고어가 상원의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베트남전 참전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피할 수 있었던 일을 자원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플러스가 됐다.

고어의 과거 경력을 밝히는 일은 간단했다. 2천만 명이 지켜보는 전당대회 연설이나 그날 밤 상영되는 자전적 비디오를 통해 자신이 직접 할 수 있었다. 정작 어려운 문제는 경제 관련 발언의 수위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였다. 클린턴 시절의 번영을 찬양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유권자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해 듣고 싶어했다. 고어는 호황에서 소외됐다고 느끼는 근로계층에 호시절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했다.

기존의 여론조사 담당자 해리슨 히크먼의 조언에 따라 고어는 “나는 권력자의 편이 아니라 국민의 편!”이라는 전통적 인기영합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린버그는 고어가 전당대회 연설에서도 그 발언을 하되 계급투쟁적 발언을 반복하기보다는 점차 좀더 포괄적인 주제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식 분노의 정치는 경제불황 시절에 더 어울리는 것이었다. 호황기에는 낙관적 메시지가 필요했다. 전당대회에서는 이미 익숙한 인기영합주의적 발언으로 민주당의 지지기반을 다진 다음 근로자 계층뿐 아니라 중산층 유권자까지 기반을 넓혀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어의 참모진은 그린버그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린버그는 그날 주장한 전략을 8월 중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기 전 보다 확실하게 다졌다. 이탈리아 돌로미테山에서 휴가를 보내는둥 마는둥 하고 돌아온 그린버그는 일련의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그의 전략적 직감은 타당성이 있는 것 같았다.

로스앤젤레스의 정치전문가들은 전당대회 연설에서 ‘근로계층 가정’을 9번이나 언급한 고어의 발언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그들은 고어의 그런 발언이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고어는 여러 연설에서 제약회사·보험회사 등 일부 인기 없는 특별 이익집단들을 공격했지만 일률적 경제 평준화나 부유층에 대한 중과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 노동절 이후의 한 연설에서는 경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중산층 가정’을 12번, ‘근로계층 가정’을 단 한 번 언급했다.

공화당은 필라델피아 전당대회에서 본의 아니게 민주당의 신 전략을 지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디바인은 이를 가리켜 공화당의 전략상 일대 실책이라고 말했다. 부시는 민주당 집권기가 호시절이었지만 클린턴-고어 정부는 그보다 더욱 좋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말했다. 고어의 선거운동본부에서 운영하는 포커스 그룹은 그 주장에 ‘코방귀’를 뀌었다고 디바인은 말했다.

부시의 발언은 미국이 ‘제 궤도’를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비율을 오히려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당 집권 8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면 굳이 공화당 후보를 선출할 이유가 있겠느냐는 단순한 논리야말로 고어의 이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고어가 올 여름 선거전에서 이전의 부진을 씻고 부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고어 자신이었다. 그는 선거운동에는 서투를지 모르지만 지치는 법이 없었다. 최악의 시기에도 고어의 추진력과 강력한 의지가 참모진에게 버틸 힘을 주었다. 고어의 언론담당 보좌관인 빌 냅은 “고어는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자세가 꼿꼿하지만 사실은 마음속이 더 꼿꼿하다”고 말했다.

고어는 자기 자신과 참모들을 보통인간이 참을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인다. 모자라는 잠은 운동으로 보충하는 것 같다. 호텔 방에 러닝머신을 들여놓고 여행가방 속에 아령을 넣고 다닌다. 부시와 마찬가지로 고어도 달리기를 하거나 역기를 들 기회를 놓치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고어는 부시와는 달리 쉬는 법이 없다. 고어의 참모들은 두 후보의 대조적인 면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부통령인 고어는 여행할 때 핵무기 발사 암호가 들어 있는 서류가방을 지참한다(군사 보좌관이 들고 다닌다)
. 고어 진영의 대변인 크리스 리헤인은 부시의 보좌관들도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지만 그 안에는 부시의 베개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고어는 빈틈없이 꽉찬 스케줄을 요구했다. 리헤인은 아이오와州 예비선거날 밤을 회고했다. 고어 선거진영이 막차로 뉴햄프셔州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고어가 그곳에서 오전 6시 30분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리헤인과 다른 참모들은 스케줄이 빈 2시간 동안 모자라는 잠을 보충하려 했다. 한 방에 있던 고어의 참모 마이클 펠드먼과 리헤인이 호출기와 이동전화를 꺼놓고 막 잠이 드는 참인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들이 노크 소리를 무시하자 그 사람은 아예 계속 노크를 해댔다. 그 성가신 방문객은 고어였다. “나를 안 들여보내줄 건가?” 그는 토라져서 물었다.

고어는 까다롭고 신중하지만 풍자나 짓궂은 장난도 즐긴다. 펠드먼이 워싱턴포스트紙와의 인터뷰에서 리헤인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잔다고 불평하자 고어는 자기 방을 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들어선 방에는 고어가 펠드먼을 위해 주문한 호화판 침대와 리헤인을 위한 아기침대가 있었다. 바보스럽고 조금은 어설픈 시도였지만 참모들은 고어의 노력이 고마웠다.

전당대회와 함께 러닝메이트를 선택할 시간이 다가왔다. 부통령 후보 선정은 생기 없는 선거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회임이 분명했다. 지난 2월 부통령 후보 대상 명단에 다른 40명의 이름과 함께 조 리버먼을 올려놓은 것은 참모들이 아니라 고어 자신이었다. 후보가 4명으로 좁혀졌을 때 리버먼에 초점을 맞춘 것도 고어였다. 다른 후보들은 존 케리 상원의원(매사추세츠州)
과 은퇴하는 밥 케리 상원의원(네브래스카州)
, 그리고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노스캐롤라이나州)
이었다.

존과 밥은 고어가 보기에 지나치게 독립적인 후보로,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을 품을 가능성이 컸다. 쿠엘로의 생각대로 리버먼은 고어를 위한 고어, 즉 충성스럽게 기꺼이 봉사하는 부통령이 돼주리라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실제로 리버먼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이건 기적이야”라고 외쳤다)
.

젊고 TV 정치에 아주 능한 에드워즈는 일부 참모들, 특히 밥 슈럼이 선호한 후보였다. 엄청난 부자이자 전직 소송 전문 변호사로 98년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했던 에드워즈는 슈럼의 가장 수지맞는 고객 가운데 하나였다. 고어의 한 고위 보좌관에 따르면 슈럼은 고어가 에드워즈를 찍으리라 확신한 나머지 에드워즈의 부인에게 자기 부인을 보내 선거운동에 적당한 의상을 구입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젊고 활력 넘치는 에드워즈는 창백하고 입술을 꾹 다문 딕 체니와 좋은 대조를 이뤘을 것이다. 그러나 8월 6일 내슈빌의 호텔 방에서 측근들과 한 자리에 모인 고어는 역사에 남을 원대한 선택을 찾고 있었다. 고어는 정치적으로 신중하고 추세를 면밀히 파악하는 성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강력하고 비전을 가진, 대담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도자로 본다. 슈럼과 에스큐는 빌 데일리·태드 디바인 및 고어의 부인 티퍼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논의를 시작한 지 4분 만에" 고어가 리버먼을 택하리라는 것이 명확해졌다고 한 참석자는 말했다. 리버먼이 정통 유대교 신자라는 사실은 거론되지 않았다. 그의 종교가 일부 유권자들 사이에 숨어 있는 反유대감정을 자극하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선거운동본부는 편견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하지 않았지만 다른 조사 결과 리버먼의 종교가 부정적 요소는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리버먼의 참모들은 민주당 계열의 좌파 이익집단들이 소수민족 차별철폐 정책에 대한 그의 비판적 입장과 중도노선을 두고 리버먼을 거부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심사과정에서 그는 민주당 노선과 다른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사실 고어의 일부 참모들은 르윈스키 스캔들 때 리버먼이 클린턴을 비난한 것이 민주당 지지세력의 흥미를 잃게 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고어 진영은 여론조사를 통해 이런 가정을 점검했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고어 자신은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을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선택을 한 것이 마냥 즐거웠다. 고어 진영은 리버먼을 선택함으로써 마침내 동부 일류 언론계 인사들의 마음을 사게 됐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옳은 판단이었다. 마침내 일요일 밤 늦게 리버먼으로 낙점됐을 때 고어와 측근들은 아침 뉴스를 겨냥해 그 결정을 오전 6시 몇몇 주요 TV 방송국에 흘리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도 백악관에 알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어의 선택을 TV를 통해 알게 된 백악관의 대통령 참모들은 못마땅했다. 클린턴의 한 고위 보좌관은 고어의 모든 행동은 클린턴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어는 부시를 물리치기 전 먼저 빌 클린턴을 무찔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가 선거운동에서 고전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9시쯤 고어의 전화를 받은 클린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자랑스럽소. 늘 나보고 내리라고 했던 대담한 결정을 이번에 당신이 내렸소.”

그러나 고어와 리버먼이 화요일 공식 발표에서 클린턴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자 클린턴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클린턴은 고어의 어설픈 선거운동과, 그가 백악관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었다. 6월 캘리포니아州에서 열린 선거자금 마련 모임에 날아간 클린턴은 고어의 새 선거운동 책임자 데일리에게 다양한 부통령 후보감들의 장단점에 대해 설교했다.

고어의 참모진은 클린턴의 도움을 반기지 않았고, 클린턴은 지칠 줄 모르는 정치적 에너지를 쏟아부을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우선 중요한 것이 부인 힐러리의 뉴욕州 연방 상원의원 선거였다. 클린턴은 힐러리의 선거운동에 온몸을 던지는 열정을 보였다. 그가 역할의 반전, 즉 아내가 진정 원하는 일을 하도록 돕는 일을 통해 죄의식을 덜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참모들이 생각할 정도였다.

2000년 2월 힐러리가 상원 입후보를 선언할 때 클린턴은 “선수가 고난도 동작에 성공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올림픽 대표선수 코치처럼 무대 뒤를 왔다갔다 했다”고 토니 불록은 자신이 본 클린턴의 모습을 회상했다. 은퇴하는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 상원의원의 비서실장인 불록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의자를 권했지만 거절당했다. 클린턴은 “초조해 죽겠다”고 말했다.

힐러리의 연설 원고는 역시 그들 부부답게 출마선언 당일 아침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처음에 클린턴 대통령은 뉴욕州 채퍼콰의 새 집에 칩거 중이던 힐러리와 차고에서 일하는 연설문 작가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배달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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