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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미 대선 -성급한 승리의 축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 대통령 선거 이튿날인 11월 8일 새벽 2시 테네시州 내슈빌에는 궂은 비가 내렸다. 앨 고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진영의 빌 데일리 선거운동본부장은 차량 행렬의 뒤쪽 차 속에서 선두에 있는 고어에게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다. 이미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를 시인한 고어는 비를 맞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지지자들에게 그간의 성원에 감사하는 연설을 하기 위해 전쟁기념관 밖에 마련된 무대로 가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데일리는 고어가 패한 것으로 집계됐던 플로리다州로부터 새 개표 결과를 입수했다. 표 차는 차량 행렬이 호텔을 떠날 때의 5만 표에서 매분 줄어들어 2천 표까지 좁혀졌다. 데일리는 승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고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실언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그는 휴대폰으로 고어에게 “아무튼 제발 무대로 나가지는 말라”고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고어는 연설을 하지 않았고, 이제 그 전쟁기념관은 선거 당일 밤 어느 후보도 확보하지 못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내전의 출발지로 변했다. 부시 가족이 텍사스州 오스틴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동안(시기상조였다)
고어측은 새로운 공격을 꾀하고 있었다. 두 후보는 기자회견, 홍보전, 소송, 정보 흘리기, 기계 또는 수작업에 의한 재개표를 통해 플로리다州의 최종 집계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도록 유도하는 한편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강화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백악관 고지 탈환을 두고 두 후보 진영이 벌이는 싸움은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통제불능 상태로 치달을지도 모른다. 과거 같았으면 조용히 막후에서 해결됐을 문제가 클린턴 시절에나 있을 법한 또 한 차례의 역겨운 드라마로 변해버린 것이다. 주제만 섹스에서 권력으로 바뀌었을 뿐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와 같은 광기가 미국인들을 또다시 사로잡고 있다.

선거일까지 한바탕 전쟁을 치른 두 후보는 또 한 차례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역사적인 유사성이 함축한 뉘앙스도 대단했다. 고어의 선거운동본부는 故 리처드 데일리 前 시카고 시장의 아들 빌 데일리가 이끌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40년 전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다. 반면 부시 진영은 제임스 A. 베이커 前 국무장관이 이끌고 있다. 베이커는 제럴드 포드 前 대통령의 1976년 재선운동에 참여했다가 아깝게 승리를 지미 카터에게 넘겨준 인물이다.

양측은 고상한 목적을 내세웠다. 누가 승자로 판명나든 승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후보들의 처신과 법적 대응은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이 상대편 후보를 싫어한 이유를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고어의 무자비한 권력욕과 부시의 능글맞은 거만함이 바로 그것이다. 또 그것은 결국 누가 백악관 주인이 되든 그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부시의 경우 플로리다州 노년층 유권자들이 잘못 투표한 데 힘입어 우연찮게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로, 또 고어라면 홍보전문?ㅊ?;永?덕택에, 그리고 자신의 약싹빠른 면모 덕택에 권력을 획득한 ‘냉혹한 왕자’라는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재개표 소동으로 인한 교착상태는 세계 민주주의의 산실인 미국 정치가 분열과 난무하는 정보, 그리고 기이함 그 자체 때문에 무너졌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유권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양분됐다. 마치 별개의 두 국가가 선거한 것처럼 고어는 동부와 서부 연안 州들 및 5대호 주변 지역을, 부시는 그 외 지역을 거의 싹쓸이했다.

의회도 마찬가지로 양분됐다. 하원은 공화당이 장악했지만 그들은 근대 역사상 가장 근소한 다수 지위를 ‘누릴’ 것이다. 상원은 1880년 이래 최초로 50 對 50으로 양분될지 모른다. 언론도 두 번씩이나 오보를 냄으로써 망신을 당했다(첫 오보는 공화당이 지배하는 팬핸들에서 투표가 끝나기 전에 고어의 우세를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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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의 혼란에 비하면 선거 당일 밤의 혼란은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른다. 먼저 악몽의 시나리오는 케케묵은 선거인단 제도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플로리다州와 어쩌면 간발의 표차로 승패가 갈린 뉴멕시코·오리건州 등이 12월 18일(선거인단의 투표 예정일)
까지 최종 결과를 확정하지 못할 가능성이다.

그럴 경우 고어가 나머지 선거인단의 과반수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선거인단 투표에서 두 후보의 득표수가 같다면 결정은 하원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1824년 이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대통령의 아들이었던 존 퀸시 애덤스는 1824년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결국 하원 표결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물론 부시든, 고어든 그 단계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각 후보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고어는 총 1억1백만 명이 투표한 일반투표에서 부시를 20만 표 차로 앞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거인단 수다. 부시가 플로리다州에서 유지하고 있는 우세는 비공식적이고 근소한 차이지만 그 정도만 해도 선거인단 합계에서 잠정적 승리를 선언하기에 충분하다. 부시는 벌써부터 무게를 잡으며 조각 작업에 착수했다.

그 사이 고어 진영은 플로리다州에서 투표 부조리가 광범하게 저질러졌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는 4개 카운티에서의 수작업 재개표를 요구하는 동시에 유권자들의 소송을 독려했다. 워싱턴의 일부 민주당 인사들은 만약 결과적으로 부시가 당선될 경우 고어가 결과 발표를 지연시키기 위해 훼방을 놓는 떳떳지 못한 패배자로 비칠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고어 자신은 개인적으로 침착을 유지했고, 워싱턴의 부통령 관저에서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터치 풋볼 연습을 하는 여유를 보였다.

데일리도 태연한 체했다. 선거인단 투표는 12월 18일로 예정돼 있고 신임 대통령 취임식도 내년 1월 20일이 돼야 거행된다는 것이다. 그는 뉴스위크와 가진 인터뷰에서 “첫째, 우리가 승리했다고 본다. 둘째, 지금 상황을 ‘위기’로 표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1월까지는 새 대통령이 없어도 되는 상황에서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데일리의 지적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뉴스위크가 새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은 플로리다州에서 일어난 일의 전모를 알고 싶어 했고, 그것을 알아낼 때까지 기다릴 용의가 있다고 응답했다. 또 그들중 다수가 고어가 부시에 대해 패배 시인을 철회한 것이 옳은 행동이었다고 대답했으며(66% 對 22%)
, 더 많은 다수가 ‘사태를 가급적 빨리 해결하기’보다는 플로리다 투표와 관련된 ‘모든 합당한 의문’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72% 對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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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4%는 플로리다州의 문제가 늦어도 해외부재자 투표함이 도착하는 11월 17일까지는 해결돼야 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플로리다州에서의 ‘모든 법적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선거결과 발표를 미뤄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36%에 불과했다.

이번 선거의 관건이 플로리다州 투표용지에 뚫린 구멍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는 것은 이상하지만 사실이다. 그 논란으로 투표 과정 자체에 뜨거운 시선이 집중됐다. 투표는 미국에서 가장 귀중한 제도로 인정받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케케묵은 관료주의와 낡은 기계에 의존하고 있다.

이같은 투표 제도는 만일 현대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 이번처럼 중요한 선거가 아니고 사소한 선거였다면 그저 웃음을 자아낼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후보와 선거운동에 완전히 냉소적이 돼버린 유권자들은 개표의 신성함에 대해서도 똑같이 냉소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선거인단 제도에 대해서는 분명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뉴스위크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57% 對 33%로 그 제도의 폐지를 원했다.

2000년 미국 선거의 위기는 민주당원인 테레사 르포어에 의해 올 가을 그곳에서 소리없이 시작됐다. 선거관리 책임자로 선출된 르포어는 노령 유권자들의 편의를 고려해 투표 용지를 ‘나비형’으로 바꾸었다. 전에는 투표용지에 후보들의 이름이 수직으로 배열되고 그 오른쪽에 펀치 구멍이 있던 것이 이젠 후보자의 이름이 투표용지 양쪽에 서로 어긋나게 배열돼 있고 그 사이에 구멍을 뚫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새 투표용지는 법에 따라 홍보가 됐지만 문제의 구멍에 대한 설명은 소개되지 않았다.

노년층을 비롯해 유권자 다수는 투표 용지의 양쪽에 서로 어긋나게 배열된 후보들의 이름 때문에 혼란을 겪었다.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일부 유권자들은 고어에게 투표한다고 한 것이 엉뚱하게 개혁당의 패트 뷰캐넌 후보에게 찍었을 수도 있다(뷰캐넌의 이름은 고어의 이름 바로 위 반대편에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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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의 보고에 의하면 압도적으로 고어를 지지하는 그 카운티에서만도 1만9천 명 이상의 유권자가 ‘2중 펀치 구멍’을 내 모두 무효로 처리됐다. 내슈빌에 있던 고어와 민주당전국위원회(DNC)
의 참모들은 선거일인 7일 일찍부터 투표용지의 문제점에 대해 보고받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24분 플로리다州의 DNC 선임 법률 고문은 르포어에게 투표용지가 ‘혼동을 준다’는 팩스를 보내며 현지의 모든 선거 관리들로 하여금 유권자들에게 각별히 주의를 환기시키도록 ‘즉각’ 지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에 따라 르포어는 팜비치 카운티 전역의 투표소에 ‘유권자 주의사항’이라는 안내 전단을 게시했지만 곧이어 큰 혼란이 발생했다. 사실 DNC 간부들이 그런 혼란을 부채질하는 데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초기 출구조사 결과 플로리다州에서 부시와 고어가 막상막하로 나왔다는 것을 의식한 DNC 간부들은 텍사스州 소재 텔레마케팅 회사인 텔레퀘스트에 의뢰해 팜비치의 유권자들에게 “일부 유권자들이 오늘 팜비치 카운티의 펀치카드 투표용지 때문에 혼란을 겪었습니다. 귀하도 실수로 다른 후보를 찍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전화를 하도록 조치했다.

민주당측은 텔레퀘스트社의 전화홍보 내용으로 미뤄볼 때 팜비치 투표에 대한 항의가 고어의 패배 결과 발표 뒤 급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화당측은 DNC가 사소한 문제를 침소봉대했다고 반격했다. 실제로 민주당측이 그랬다면 그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보카 레이턴에 있는 중류층 은퇴자 집단촌인 센추리 빌리지에서 유대인 유권자들은 고어에게 투표한다는 것이 뷰캐넌에게 잘못 투표했을지도 모른다고 안달했다.

많은 유대인들은 개혁당 대통령 후보인 뷰캐넌을 反유대주의자로 간주한다. 센추리 빌리지에서 뷰캐넌은 58표를 얻었다. 그것은 그가 미국 전역에서 얻은 평균 득표율의 배에 해당한다. 실비아 로렌스(59)
는 “진보적인 민주당 지지자인 내가 뷰캐넌에게 투표할 것 같으냐”라고 반문했다. 그녀는 “우리를 혼동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투표용지를 괴상하게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르포어는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혼동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팜비치 카운티의 총 45만 표 가운데 1만9천 표가 2중으로 펀치 구멍이 나 있었다. 또 대통령 후보 투표란에 펀치 구멍이 나지 않은 표도 1만 표나 됐다. 고어와 데일리는 일단 선거패배 인정을 취소하기로 결정한 뒤 고어가 사실상 승리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플로리다州 전역의 선거구를 철저히 조사하도록 선거운동본부 직원들에게 명령했다. 고어측은 고어 선거운동본부의 ‘상황실’을 지휘할 인물로 신망이 투터운 변호사인 론 클레인을 내세워 공세를 시작했다.

클레인은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선거운동본부 직원들에게 위법 가능성에 대한 증거와 진술서를 신속히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수신자 부담 전화번호를 이용해 수백 건의 진술서를 끌어모았고 언론에 인터뷰한 유권자들을 찾아냈다. 고어 진영은 팜비치 카운티에서 1만9천 표가 ‘2중 펀치 구멍’이 난 사실을 곧 알아냈다.

고어의 한 고위 보좌관은 “그때부터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곧이어 고어 진영은 플로리다州의 일류 변호사로 연방검사를 지낸 켄덜 코피를 고용하는 동시에 ‘재개표 위원회’를 설치하고 고어의 선거자금 모금총책으로 워싱턴의 변호사인 피터 나이트를 위원장에 임명했다.

고어 진영은 팜비?ㅅ?絹櫻ㅊ洹恝層櫻ㅊ섭?첸?카운티에서 다른 ‘부조리’의 증거를 찾는 노력을 배가했다. 플로리다 주법은 표차가 극히 적은 경우 ‘재개표’를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재개표가 진행되고 있고 해외의 마지막 부재자 투표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민주당측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목표는 수작업 재개표였다. 펀치 카드 기계가 비치된 州에서는 ‘재개표’란 카드를 자동계수기에 다시 한번 통과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고어측은 모든 투표용지가 손으로 검사되기를 원했다. 민주당측은 요구사항의 대부분을 관철시켰다. 팜비치의 4개 ‘샘플’ 선거구에서의 수작업 개표가 그중 하나다. 민주당측은 그것으로 고어를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리드한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해 팜비치 카운티의 무효처리된 모든 투표용지를 재개표하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브로워드 카운티의 3개 선거구에서도 비슷한 재개표가 허용됐다. 그곳에서는 펀치 구멍이 완전하지 않아 무효로 처리됐지만 재개표에서 어느 쪽으로든 투표자의 분명한 의사가 드러날 경우 유효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는 표가 약 6천 표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텍사스州 오스틴에서 부시 진영의 간부들은 근엄하게 정권인수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부 공화당측 인사들은 그들이 너무 방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부시 진영의 고위 전략가들은 플로리다州에서 부시가 3백 표 차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이 17일 마지막 부재자 투표용지가 개표될 때에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고어가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패배를 인정한 것이 고어의 진정한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가정했다.

제임스 베이커 前 국무장관은 점잖게 고어측에게 혼란조장 중단을 촉구했다. 부시 진영은 합리적인 융합자로 보이기를 원했을 뿐 윽박질러 재개표를 중단시키는 것처럼 보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상황은 9일 돌변했다. 우선 데일리로부터 호전적인 발언이 나왔다. 그는 “대통령직은 사소한 기술적인 방법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뒤 그는 유권자들이 개인적으로 제기한 소송을 민주당에서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부시 진영의 전략책임자인 칼 로브는 “선거 당일 패배했다고 인정한 싸움을 이제는 이기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문제는 어떻게 상황을 해결하느냐였다. 부시 진영의 첫 전략은 불가피한 재개표를 지지하는 동시에 부시가 대통령에 선출된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었다. 부시 진영은 해외 부재자 투표만 남겨두고 14일 화요일까지의 결과를 최종으로 ‘인정’하려는 캐서린 해리스 플로리다 주무(州務)
장관의 계획을 지지했다.

그러나 10일 플로리다州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보좌관들이 특히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카운티에서의 수작업 개표의 위험에 대해 큰 우려를 제기했다. 그러나 고어 진영이 플로리다 주법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수작업 개표를 요구했기 때문에 막을 방법이 없었다.

드디어 11일 베이커가 수작업 개표를 막기 위한 소송을 연방법원에 제기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베이커는 수작업 개표는 기계개표보다 신뢰성이 떨어지며 개표감독위원회의 주관적인 판단에 좌우되기 쉽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개표를 두 번이나 했고 부시가 모두 이겼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진영의 다른 보좌관들은 팜비치 카운티에서의 ‘2중 펀치 구멍’에 대한 소문은 음흉한 저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부의 잭슨빌 지역에서는 투표용지 디자인이 다른 데도 2만2천 표가 ‘2중 펀치 구멍’으로 무효화됐다. 베이커는 “어느 시점에서는 플로리다州 유권자들, 그리고 모든 미국 유권자들이 선거절차에 최종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부시 진영은 50쪽 분량의 수작업 개표 정지 요청서에서 플로리다州의 선거법이 미국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정당한 선거절차 결정권을 위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고어 진영에서는 하버드大 헌법학자 로렌스 트라이브를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부시 진영이 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정한 것은 오히려 고어 진영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우선 법정 투쟁에 의존한다는 비난을 사는 쪽이 민주당뿐이 아닌 결과가 빚어지게 됐다. 고어 진영은 재빠르게 과거 플로리다州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미 수작업 개표가 있었으며 부시 자신도 텍사스 주지사 시절 텍사스州에 수작업 개표 활용을 요구하는 법안에 서명한 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민주당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주정부에 대폭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부시가 이제는 민주당처럼 행동하며 州의 문제를 연방법원으로 끌고 간다고 공격했다. 고어 진영의 한 참모는 “그들이 겁을 먹었다”며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고어 진영이 반드시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부시 진영은 워싱턴의 특급 변호사 테드 올슨을 고용해 참모진을 보강했고 더 폭넓은 전쟁의 가능성에 대비했다. 그리고 고어가 근소한 차로 승리한 州도 있다. 그중 두 州가 아이오와와 위스콘신이다. 부시 참모들은 그 州들의 투표 상황을 조사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고어 진영의 고위 보좌관들은 양 州 모두 투명한 정치와 진보당 전통을 갖고 있다며 그 아이디어를 비웃었다. 고어 진영의 한 참모는 “그들이 위스콘신州의 투표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정말 반길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고어와 부시가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빌 클린턴 대통령은 겉으로는 조용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사태 진전을 예의주시했다. 백악관 건립 2백주년 기념식에서 클린턴은 부시 가문에 경의를 표했다. 그는 부시 前 대통령에게 아들이 자랑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前 대통령 부부가 백악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라는 클린턴의 초대를 거절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서로 매우 따뜻하게 대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사적으로는 고어의 승리를 가정한 도상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10일 고어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조언했다. 백악관측에 따르면 클린턴은 결국 대통령 승계 문제가 윈-윈의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고어가 이긴다면 클린턴에게는 훨씬 좋다. 그러나 부시가 이긴다면 대통령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애를 먹을 것이라는 것이 클린턴의 생각이다.

또 클린턴은 미국 국민이 자신의 후임자를 결정할 수 없다면 자신이 기꺼이 백악관에 계속 머물 수 있다고 농담했다. 클린턴은 한 가까운 친구에게 “힐러리가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게 됐기 때문에 나도 여기에 좀더 눌러 있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물론 농담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시절인 것 같다.( Howard Fineman 워싱턴 지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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