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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선의 국악 읽기] 기보법

중앙일보

입력

음악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음의 높이와 길이 두 가지 요소를 나타내는 기보법(記譜法) 이 필요하다.

이 두 요소가 충족되는 기보법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세종때다.

서양의 5선과 음표에 해당하는 율명(律名) 과 정간(井間) 으로 기보하는 정간보(井間譜) 가 그것이다. 세종은 향악을 정비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보태평' '정대업' 등 대대적인 음악 창작이 이루어졌는데, 이들 음악을 후대에 고스란히 물려주기 위해 악보가 필요했다.

이전의 기보법은 단지 음높이만을 기록할 뿐 음의 시가(時價) 를 나타낼 수 없었다.

그 결과 고안된 정간보는 시가를 나타내는 악보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조선조의 악보는 왕실의 의전(儀典) 용 음악을 기록한 관찬(官撰) 악보와 문인들이 남긴 민간 악보 등 두 종류가 있다.

관찬악보는 관악기.현악기를 아우르는 총보(總譜) 의 성격이 강하고, 민간 악보는 거문고 악보가 주류를 이룬다.

성현(成俔) 은 거문고 가락을 기보하는 합자보(合字譜) 를 창안했다.

뛰어난 명연주가라 하더라도 사람과 함께 그의 신묘한 음악은 사라지고 말아, 후세사람들이 들어볼 수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박곤.김복근 등과 함께 만들었다.

스승 없이 스스로 연주법을 터득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고안된 성현의 합자보는 이후 문인들이 즐겨 연주하던 거문고 가락을 기록하는 데에 지속적으로 사용돼 풍류음악 변천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다.

정조대의 학자 서명응(徐命膺) 은 조선조 궁정에서 연주되던 음악을, 그의 손자인 서유구는 19세기를 전후하여 문인들이 연주하던 거문고.금.생황.양금 등의 가락을 악보로 남겼다.

이승무(李升懋) 는 집에 거문고가 있으나 그것을 배우려 해도 스승이 없어 연주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거문고의 실제소리를 묘사한 구음(口音) 으로 연주법을 부호로 나타낸 '삼죽금보' (1841) 를 편찬했다.

조선조에 국가 혹은 개인이 편찬한 고악보는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5백여년에 걸쳐 만들어져 100여종에 이른다.

서양음악은 작곡가가 남긴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 음악은 가락을 익히고 난 다음 자신이 가락을 덧붙이거나 일부를 변형하여 자연스럽게 변화를 준다.

이전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리듬.박자 등 선율에 적지 않은 변화의 궤적이 바로 고악보에 그대로 담겨져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수백년 전에 작곡가가 남긴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서양음악과 다른 우리 음악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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