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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은 부당한 것과 직을 걸고 싸울 줄 알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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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법조인은 누군가를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라.”

 법조계 원로 문인구(88·사진) 전 대한변협 회장은 후배 법조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그는 25세 때인 1949년 조선변호사시험(47~49년 시행된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51년 서울지검 검사로 첫 발을 내디뎠다. 12년간의 검사 생활 동안 그는 ‘잘나가는 검사’였다. 58년 국가보안법 개정안 초안을 만들고 국회에서 이를 통과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검찰총장의 기소명령에 “죄가 없어 기소할 수 없다”고 맞서다 부장검사를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부당한 것을 참지 못했던 문 변호사는 대한변협 회장으로 있던 87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가 나오자 즉각 반박 성명을 냈다. 뒤를 이어 사회 각계각층의 성명이 나왔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이른바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생애를 담은 회고록(『역사의 격랑에 오늘을 묻다』)을 최근 발간한 문 변호사를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노(老) 법조인은 “인간을 알고 상식을 알고 나서야 법도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 국가보안법 개정안 초안을 만들었던 58년 상황은.

 “내겐 고통스러운 이야기다. 국보법은 1948년 제정됐다. 하지만 그걸로는 무력 공격에서 비밀공작으로 선회한 남파간첩들을 처벌하기 어려웠다. 실무자로 참여해 국보법 개정안 초안을 만들었다. 그건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초안을 넘겼더니 정부와 집권당인 자유당이 일부 조항을 집어넣었다. 이에 야당이 ‘독소조항’이라며 개정안에 반대했다. 그러자 개정안 공청회 하루 전 당시 신언한 법무부 차관이 나를 불러 “독소조항은 검사들이 넣은 것이라고 말해달라”고 요구하더라. 물론 거부했다. 결국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을 감금하고 여당 의원들만으로 법안을 강제통과시켰다. 이른바 ‘2·4 파동’이다. 이것이 자유당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 잘나가다 검찰청을 떠난 이유는.

 “당시 검찰총장들과 여러 번 부딪쳤기 때문이다. 1961년 검찰총장이 “특별히 신경쓰는 사건이니 방적회사 회장을 기소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수사를 아무리 해도 죄가 없어 불기소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검찰총장이 직접 불러 기소하라고 명령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불기소 이유서와 함께 사표를 같이 써냈다.”

 - 4·13 호헌조치 반박성명을 내게 된 배경은.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성명을 낸다고 해서 TV를 봤는데, 개헌 논의를 금지하겠다는 거다. 그 즉시 성명서를 작성해서 대한변협 집행부 회의를 열었다. 당시 매일같이 변협에 와 있던 중앙정보부 사람들을 따돌린 뒤 임원 전원이 각 신문사를 찾아 다니며 성명서를 배포했다. 전국 각지의 집회에서 대한변협의 성명서 전문이 그대로 낭독되면서 파문이 커졌다.”

 -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법조인은 부당한 것을 만나면 직을 걸고 싸울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또 범죄가 하나의 사회현상이라는 인식 아래 공정하게 수사하고, 피의자와 그의 가족환경까지 살피는 인간적 정성을 보여야 한다.”

글=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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