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꺼진줄 알고…오바마 서울서 '대형 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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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마이크가 켜져 있는 줄 모르고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나눈 대화가 공개돼 곤욕을 치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7일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해 마이크를 감싼 채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자리를 비웠는데도 미국 워싱턴 정가가 오바마의 발언을 놓고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럽다. 그럴 만도 한 게 오바마 대통령이 ‘대형 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서울을 방문 중인 오바마 대통령은 26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90분간 정상회담을 했다. 사고는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기다리던 중에 발생했다. 기자들이 입장하기 전 오바마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대통령 쪽으로 다가앉아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오바마=“이번이 내 마지막 선거다. (11월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에는 내가 더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

 ▶메드베데프(영어로)=“이해한다. 그 얘기를 블라디미르(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

오바마 대통령(오른쪽)은 지난해 11월 G20 정상회의에서도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마이크를 켜둔 채 대화를 나누다 구설에 올랐다. [중앙포토]

 문제는 러시아 측 방송용 마이크가 켜져 있는 줄도 모른 채 두 사람이 비밀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점이다. 그 바람에 대화 내용과 장면은 러시아 방송기자를 거쳐 미국 ABC방송을 통해 고스란히 공개됐다. 이 대화는 미국이 추진한 유럽 미사일방어(MD)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은 MD가 이란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러시아는 자국을 겨냥한 것이라며 재검토를 강하게 요구해왔다. 그런 만큼 오바마 대통령으로선 대선이 끝나면 MD 계획을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뜻을 러시아 측에 전한 셈이다. 녹음된 대화 중엔 “푸틴이 내게 여유(space)를 좀 줬으면 좋겠다”는 발언도 포함돼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두 사람의 대화는 세계 지도자가 국내에서 직면하고 있는 정치 현실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하는 보기 드문 장면”이라며 “하지만 오바마로선 야당인 공화당에 자신을 때릴 수 있는 곤장을 건넨 셈”이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공화당은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존 매케인 상원의원에서부터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 등 대선 주자까지 들고일어났다. 베이너 의장은 트위터를 통해 “대통령이 귀국하면 도대체 ‘MD에 유연성을 발휘하겠다’는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 들어봐야겠다”고 했으며, 하원 군사위 부위원장인 맥 손베리는 “선거 후에 MD를 놓고 흥정을 하겠다는 거냐”고 비판했다. 롬니도 성명을 내고 “MD와 관련해 러시아에 굴복하려는 신호를 보냈다”며 “미국인들은 오바마가 연임하고 나면 또 무슨 이슈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것인지 알 권리가 있다”고 몰아세웠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오바마 대통령은 하루 뒤인 27일 기자간담회에서 해명에 나섰다. 발언의 진의를 묻는 AP 기자의 질문에 그는 “정말로 마이크가 켜져 있었느냐”고 겸연쩍은 웃음을 지은 뒤 “무기 감축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슈”라고 말했다. 그러곤 “러시아 대선이 막 끝났고, 미국 대선과 총선거를 몇 달 남겨둔 지금 결론을 내기는 어려우니 대선이 끝난 뒤에 논의하자는 원론적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그의 귀국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도 마이크가 켜져 있는 줄 모르고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뒷담화를 한 내용이 보도돼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이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그는 거짓말쟁이다”라고 하자 오바마 대통령은 “나는 그런 그를 늘 상대해야 한다”고 맞장구를 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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