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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난징(南京)과 나고야(名古屋)

중앙일보

입력

중국의 난징시와 일본의 나고야시는 오랜 자매도시이다. 1978년 자매결연을 맺은 이래 두 도시의 교류는 활발하였다. 두 도시는 자매도시로 여러 가지 공통점이 많지만 특히 역사적 처지도 비슷하다.

일본의 중경(中京)으로도 불리우고 있는 나고야시는 일본의 전국(戰國)시대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배출하였지만 그들이 일본의 최고 지배자가 되자 모두 나고야를 떠났다. 17세기초 일본을 마지막으로 통일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최고 지도자인 쇼군(將軍)이 되자 출신지 나고야를 떠나 자신의 근거지 에도(江戶) 즉 지금의 도쿄(東京)로 수도를 옮겨 갔다. 그 이후로 나고야는 공동화(空洞化)되고 도쿄가 일본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중국 난징시의 경우에도 5세기 중국의 남북조 시대이래 역대 왕조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소수민족 몽골(元)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그들의 근거지인 몽고고원과 가까운 북방에 따뚜(大都) 즉 지금의 베이징에 수도를 건설하였다. 그 후 원(元)을 멸망시킨 농민 반란군 주원장(朱元璋)은 명(明)을 건국하고 난징을 수도로서 다시 찾았다. 그러나 주원장 사후 그의 아들이 난(亂)을 일으켜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영락제(永樂帝)가 되었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비인륜으로 수도 난징에서 영락제에 대한 민심이 이반되었다. 영락제는 부득이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북평(北平)으로 수도를 옮겼고 그 후 난징은 공동화되는 반면 북평은 중국의 정치 중심지 베이징(北京)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 초 나고야는 미중(美中) 두 나라 냉전의 얼음을 녹이는 무대가 된 적도 있다. 40여년 전 1971년 봄 제31차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나고야에서 개최되었고 1965년 이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중국의 탁구팀이 나고야에 나타나 미국 팀과 어울린 것이다. 미국 닉슨대통령의 방중을 이끌어 낸 미중 핑퐁외교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세계는 나고야의 작은 탁구공이 지구라는 거대한 공을 움직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최근 사이좋은 난징과 나고야의 두 자매도시에 뜻밖의 균열이 생겼다. 가와무라(河村) 나고야시장이 난징시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1930년대 후반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의 사실(史實)을 부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가와무라 시장은 중일수교 40주년을 맞은 양도시의 우호교류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난징대학살은 부인할 수없는 일이며 민간인 살해와 약탈등 잔혹행위가 있었다.”고 일본의 후지무라 오사무(藤村修) 관방장관의 해명이 있었지만 가와무라 시장은 자신의 발언이 왜곡되었다고 철회하지 않고 있어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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