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은 기도합니다, 우리 아들 46명 두 번 죽이지 마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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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46용사 2주기 추모식을 하루 앞둔 25일 대전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에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묘역을 찾은 한 여성 참배객(왼쪽)이 슬픔에 북받쳐 얼굴을 가리고 있다. [대전=프리랜서 김성태]
정기환
사회부문 기자

바로 오늘이다.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22분 백령도 서남해안 앞 2.5㎞ 해역.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천안함이 두 동강 난 채 침몰했다. 46명의 젊음들은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에게 작별인사도 못 남긴 채 꽃잎처럼 스러져 갔다.

 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 바다는 말없이 물결만 높다. 해안절벽 위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은 ‘비록 육신은 죽었다 하나 그 영혼, 역사로 부활해 자유대한의 수호신이 되리라’고 숭고한 혼들을 달랜다. 백령도는 봄이 멀다. 남도에서는 이미 꽃 소식이 전해 온다지만 여기서는 사방을 둘러봐도 영령들에게 바칠 들꽃 한 떨기조차 없다.

 그날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오히려 북한을 편드느라 대한민국을 공격하고 나선 세력들이 백주대로를 횡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해안 암초에 좌초됐다느니, 선체 피로로 두 동강 났다느니, 미군 함정과 충돌했다느니 하면서 한사코 북한의 소행일 리가 없다고 나섰다.

 바다 밑에서 북한제 어뢰(CHT-02D) 부품을 건져내도 ‘조작’이라고 했다. 설사 폭침됐다고 해도 ‘경계에 실패한 것 아니냐’고 했다. 그릇된 논리와 음모론에 취해 한주호 준위나 46용사들의 희생까지 헛된 죽음으로 몰고 가려 들었다.

 사고 초기에 만난 한 백령도 어부의 얘기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암초는 무슨 암초, 벼르고 있던 북한에 한 방 맞은 게지.”

 2001년 미국의 9·11 테러나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사고는 대표적인 모바일폰 시대의 재난으로 꼽힌다. 당시 희생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연인들에게 가슴 저린 최후의 작별인사를 전했다. 얕은 상식으로도 천안함이 좌초나 금속피로, 충돌로 침몰했다면 ‘마지막 한마디’들이 남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선거철을 맞아 46용사들을 매도하는 궤변들이 횡행할 조짐이다. 남은 가족들은 애원한다. 추모는 못할망정 두 번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왜 이런 꼴이 됐나. 물질적 성취와 안온한 삶 속에 소리 없이 쌓여온 문약(文弱)의 병폐 때문이다.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의 문약은 조선 중·후기 지배계급보다 더 곯아 있다.

 그들은 거친 손으로 밭을 가는 대신 입과 혀만 살아 끝없이 ‘아니 되옵니다’ 투의 상소를 올리는 일에 목숨을 건다. 연산군 5년(1499년) 여진족이 함경도와 평안도를 습격해 100여 명의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연산군은 즉각 정벌을 위해 2만 병력을 준비시켰다. 하지만 문신들은 “오랑캐의 도발도 하늘이 전하에게 근신하라고 경고한 것”이라는 희한한 논리로 끝내 출병을 무산시켰다. 연산군은 “이처럼 무사(武事)를 소홀히 하다가 막상 변란이 닥치면 붓을 쥐고 대응하겠는가”라며 탄식했다.

 글을 읽고 중국을 사대하는 이들만이 득세하는 시대가 이어졌다. 1592년 5월 일본군 1600명과 조선군 5만 명이 용인 수지에서 부딪쳤다. 일본군의 기습으로 조선군은 대패했다. 1636년 청나라 기병 300여 기와 조선군 4만 명이 경기도 광주 쌍령리에서 맞붙었다. 선봉대 33기가 조선군을 덮치자 조선군 2만여 명은 서로 달아나다 깔리고 밟혀 죽었다. 해군기지를 해적기지로 매도하는 것을 ‘개념’으로 아는 문약 극성의 시대. 역사는 늘 눈을 부릅뜨고 있어 저를 망각하면 언젠가는 보복을 가해 오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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