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짜임새 아쉬운 '단적비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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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면 미리 가졌던 큰 기대가 오히려 병이 될 때가 있다. '단적비연수' (박제현 감독.11일 개봉)가 그런 영화다.

'쉬리' 신화를 일궈낸 강제규 감독이 제작자로 변신해 내놓은 2000년 첫 작품인데다 최진실.설경구.김석훈.김윤진.이미숙 출연, 촬영기간 9개월, 총 제작비 45억원 등이 그냥 '스윽' 지나기엔 너무 큰 화제거리였다.

더욱이 영화가 선보이기도 전에 도쿄영화제 특별초청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은 이런 분위기를 더욱 부추겼다.오죽했으면 '공동경비구역 JSA' 흥행 신화를 곧바로 이을 영화로 지목하기도 했을까. 그렇게 마음을 부풀려 놓았으니 기대를 만족시키려면 하나의 걸작이어야 했다.

그러나 신인 감독이 그 짐을 지기에는 너무 힘겨웠다. 공들인 만큼의 미덕은 곳곳에 많지만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을 만한 결정타가 어디에 숨었는지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침대2' 란 부제를 단 이 영화는 전편의 주인공들이 전생으로 거슬로 올라간 고대 어느 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여인의 증오와 야욕으로 시작된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그린 팬터지 멜로다. '전생과 인연' 이란 동양적 모티브에 상상력을 결합한 서사구조에 최첨단 기술을 가미했다. 칼과 활이 자주 등장해 자칫 액션물처럼 비치지만 박감독은 단연 '멜로 영화' 라고 말한다.

'신산 (神山)' 의 저주를 받아 온갖 재앙을 겪은 매족의 여족장 수 (이미숙) .그 재앙의 끈을 끊기 위해 화산족 한과 정을 통해 비 (최진실) 를 잉태하고 그녀를 제물로 바치려 하지만 이를 안 한이 극적으로 비를 구해 고향인 화산마을로 향한다.

거기서 비는 단 (김석훈).적 (설경구).연 (김윤진) 을 만나 우정을 나누며 성년이 되지만 제물로 밖에 살 수 없는 비극의 운명이어서 단.적.연이 쏘는 사랑의 화살을 자꾸 엇나가게 만든다.

'단적비연수' 는 물심양면으로 심혈을 기울인듯 장면 장면 볼거리가 많다. 마.모피.대나무 등 천연소재를 활용한 의상이 투박하지만 상상의 세계를 잘 그려냈고 축제 장면에 나오는 가상의 악기들까지 그럴 듯하다. 특히 산청 황매산 자락과 제주도.부안.삼척 등지를 돌며 담아낸 장쾌한 배경은 높이 살만하고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배경음악도 꽉 찬 느낌이다.

또 영화 전편에 수시로 등장하는 빠르고 거친 액션 연기는 짧게 짧게 끊어 한 대목을 만들기 보다 한 컷을 길게 가져가는 쪽을 택했고 움직이는 카메라가 현란한 액션을 더욱 긴박하게 만든다.

그러나 복잡하게 얽힌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묘사하려다 보니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기까지 서설이 길어 드라마의 짜임새를 흐트러뜨리고 애정관계를 풀어내는 데도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다. 너무 많이 담으려는 욕심이 정작 중요한 스토리 라인을 꼬이게 만들었다. 또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수 (이미숙) 의 연기가 선이 굵고 거침없는 반면 '박하사탕' 의 설경구와 '쉬리' 의 여전사 김윤진이 전작의 이미지를 크게 벗지 못하고 최진실 역시 새로운 장르 도전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Note

무거운 칼 연기를 한 수 (이미숙)에게 무게를 물으면 "쌀 한가마" 라고 했다. 사실을 말해 달라며 다시 물어도 "쌀 한가마" 였다. 그만큼 무거웠다는 소리다. 수는 손이 찥어지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칼 싸움이 힘들었다는 데는 모든 주연들도 한 목소리였다. 멜로영환데 액션에 힘을 너무 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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