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진보, 일상의 민주주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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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호 34면

제주 강정 해군기지 사업단에 있던 두 고참 대령이 주말 내내 머리에서 맴돌았다. 먼저 전 단장인 이은국 대령. 지난달 한 소식통을 통해 “그가 명퇴를 하려는데 국방부가 못하게 한다’고 들었다. 5년간 사업단에서 반대 세력의 온갖 욕을 들어가며 현장을 지킨 그에게 상을 못줄망정 왜 전역까지 막았을까. 더구나 그는 전역을 전제로 대학 교수가 될 예정이어서 3월 1일까지 군을 나가는게 좋았다.

안성규 칼럼

알아보니 그 소식통은 잘못 전했고 진짜 원인은 소송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2011년 9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제주 의회는 부지 내 문화재 조사 문제로 당시 김성찬 해군 참모총장과 그를 고발했다. 총장은 그 뒤 일반 전역을 했지만 대령은 ‘명예 전역은 소송 종결 때까지 안 된다’는 규정에 걸렸다. 서둘러도 종결이 안 됐다. 명예 전역도 교수직도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민변이 보인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민변은 군 검찰이 보강조사차 불러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방부 대변인실은 “왜 안 오는지 의견도 없다”고 했다. 취재를 하자 민변 직원은 “담당 변호사가 조중동 신문과는 인터뷰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 했다”고 전했다. 그 팽개친 소송이 50대 대령의 인생 계획을 뒤트는 데 일조한 걸 민변 담당자가 알기는 하는지.

다음 부단장이었던 홍모 대령. 그는 22일 새벽 술김에 기지 반대파의 강동균 회장과 통화하면서 “김정은 위해 열심히 하라”고 말해서 보직해임 됐다. 인터넷 매체에 공개된 녹음을 들어보니 잘못했다. 취해 꼬부라진 혀, 이름도 말하지 않고…. ‘김정은’이란 말도 해선 안 됐다. 그런데 요지는 미래를 보자는 것이었다.

술냄새 진동하는 18분짜리 녹취에서 ‘김정은’은 한 번, ‘대승적으로’ ‘멀리 보자’는 말은 여러 번 나온다. 그렇다면 전체 맥락을 봐서 처벌해도 될 텐데 해군은 신속히 보직 해임했다. 나는 또 취중 발언을 녹음해 인터넷 매체에 올린 것도 안타깝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다. 입장이 다르고 세상이 강퍅해졌다 해도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

해군 기지라는 거대 담론의 모퉁이에서 벌어진 두 사례. 거기에 등장하는 민변, 인터넷 매체, 반대파 회장들로부터 진영 대결의 긴장감과 팍팍함을 다시 느낀다.

보수ㆍ진보, 좌우 진영 간 대결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비슷한 뉘앙스로 기억에 다시 떠오르는 장면은 이번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지난 2월 이용섭 민주통합당 정책위 의장은 인터뷰에서 “왜 한ㆍ미 FTA는 반대하고 한·EU FTA는 안 그러느냐”고 묻자 이런 답을 했다.

“철저히 국익 측면에서 해야 된다…인도와 할 때는 인도가 우리처럼 생각해야 한다. 인도에 진출한다면 우리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를 넣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미국도 선진국과 체결할 때는 ISD를 안 넣는다…. 한국 같은데, 자기들보다 법질서가 떨어진 대로 진출하면… 협상이란 것은 이중적이고 전략적이다.”

‘한국 국익’이 우리에겐 선(善)이겠지만 인도나 세상 다른 나라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 위주로만 하다간 1970년대 일본이 들었던 경제 동물이란 비난을 듣기 십상이다.

그보단 진보를 표방하는 민주당 지도자답게 공정ㆍ공평한 룰과 그에 따른 국익 추구를 말하는 게 어울려 보인다. 자기 중심 사고는 정의나 진보도 아니고 글로벌 시대의 지도층에겐 너무 거칠다. 여기서도 진영 대결이 느껴진다.

이용섭 의장, 민변, 인터넷 매체, 기지 반대파 회장이 해군 기지나 FTA에 대해 말하거나 보인 행동을 과장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최근 읽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글항아리)의 글은 다른 해석을 하게 만든다.

저자 파커 파머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하고 있는 무엇이다….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움직일 때 우리는 민주의 주체이자 옹호자로서 행동하는 힘을 회복한다”고 했다. 약간 확대 해석하면 일상의 진보, 일상의 민주가 진정한 진보ㆍ민주란 것이다.

그 점에서 진보ㆍ민주 진영으로 간주되는 그들이 보인 행동과 말은 일상의 민주ㆍ진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총선 국면에서 민주ㆍ진보 진영의 주축인 민주통합당이 일으킨 여러 문제,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 대표가 일으킨 사태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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