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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터뷰] 정동영 통일부 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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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만난사람=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다른 것은 고사하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한.미, 한.일 공조와 우호.협력 관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에 한.미 간에는 한국의 대북 지원과 주한 미군의 역할 확대를 둘러싸고 인식의 갭이 커 보이고, 한.일 관계는 독도와 역사교과서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한.미, 한.일 간 긴장과 갈등 수습의 전면에 나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21일 집무실에서 만나 정부는 지금의 난국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물었다. 정 장관은 자리에 앉자마자 문고판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을 다룬 '콘디(CONDI)'라는 제목의 책이다. 겉장 안쪽에는 '스탠퍼드대학에서 뜻을 이루길 바랍니다'라는 라이스 장관의 친필 문구가 있었다. 정 장관은 "어제 라이스 장관을 만났을 때 스탠퍼드대학에 다니는 제 아들이 라이스 장관을 역할(role) 모델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더니 써주더라"고 말했다.

-한국과 미국은 두 가지 문제에서 이해와 인식이 엇갈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미국이 중장기적으로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두고 주한미군을 동북아 안정을 위한 기동군으로 전환하려는 데 대해 한국은 노무현 대통령까지 나서서 반대 입장을 밝힌 겁니다. 다른 하나는 헨리 하이드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이 '한국은 북한이 한국의 주적인지를 밝히라'고 요구한 데 대해 정 장관이 '북한은 동포, 미국은 동맹'이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라이스 국무장관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울에 왔는데, 한.미 간의 인식 차이가 좁혀졌습니까.

"라이스 장관의 방한은 국무장관 취임 후 아시아 주요 국가들과의 관계 설정과 전략적 판단의 근거 확보를 위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6자회담 재개 가능성 타진이 중요한 방문 목적이었어요. 한국에 주는 메시지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와대를 비롯한 우리 정부가 미국과 의견 차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우리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했다는 점입니다. 복선을 깐 메시지보다 명료한 의견 개진을 통해 한국 정부의 입장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고 봅니다."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미국 측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주한미군 얘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북핵과 6자회담 얘기가 대부분이었고 한.일 관계 얘기가 있었습니다."

-라이스 장관은 북한을 '주권 국가'라고 표현하고, 6자회담 틀 속에서 서면으로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말도 했는데 이 정도면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조건이 되는 겁니까.

"라이스 장관도 '숙고해서 한 말'이라고 했지만 주권 국가란 말은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서 전한 것이라고 봅니다. 주권 국가란 말 자체가 공격.침공하지 않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권 국가란 말을 협상 상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라이스 장관은 베이징에 도착해서 북한이 6자회담을 계속 거부하면 다른 선택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제재라는 억측을 낳고 있는데요.

"북한의 조속한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하는 원론적인 말일 뿐 어떤 특정한 구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유엔 안보리 회부 등의 제재를 논할 시기가 아닙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입장이고, 중국은 반국가분열법이라는 것으로 대만을 위협하고, 일본은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미.일 동맹 관계가 더욱 강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을 더욱 중시하고 한국의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신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간 한.미 관계가 미.일 관계의 들러리로 돼버리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우리는 관행적으로 냉전시기 사고의 연장 속에 있습니다만 큰 틀에서 구도의 변화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내부적으로 보면 1990년대 초반까지 육군 소장이 대통령을 하던 데서 문민.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까지 10년 사이에 급격한 정치.사회 변동을 거친 내부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젠 외교정책에 관한 변화와 신사고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한.미 동맹이라는 기본 축이 있지만 과거와 달리 북방 3각과 남방 3각 구조가 아닙니다. 한.미 동맹이라는 기본 축이 있고, 오른쪽에 일본이 있으면 왼쪽으로 중국이 있는 한.일 협력과 한.중 협력, 이런 속에서 우리가 동북아에서 평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과거와 같은 고정된 구도에서 고정된 역할이 아니라 변화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고 있는 변동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두통거리인 한.일 관계로 화제를 돌리겠습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지난 한 주 남짓한 기간에 제 각각 할 말을 다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3.1절 발언을 고이즈미 총리가 '국내 정치용'이라 규정하고 고이즈미의 그런 발언을 정 장관이 다시 반박하면서 한.일 관계는 내리막길을 굴러내렸습니다. 독도 문제, 또는 역사교과서 문제라는 암덩어리를 몸속에 지니고 한.일 관계라는 신체가 건강을 되찾을 방도가 있습니까.

"한.일 관계사 속에서 보면 95년 무라야마 담화와 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과거를 사과하고 미래로 가자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과 역사를 미화해서 후손에게 가르치는 행위는 서로 맞지 않는 언행 아닙니까. 통절한 사죄와 반성이 진실성을 가질 때 이를 바탕으로 용서와 화해가 되고, 미래가 지향될 수 있는데 이 전제가 흔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조용한 외교'가 여전히 유효한가 물으면 그렇지 않다는 게 국민의 생각이고 정부의 판단입니다."

-일본 총리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할 때는 고민도 하셨을 것 같은데요.

"짚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올해가 광복 60년과 을사늑약 체결 100년, 한.일협약 40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 아닙니까. 아무리 지방정부라 해도 '독도의 날'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데 조용한 외교 한다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 아주 무겁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통렬한 사과와 실천을 요구하는 것 외에는 한.일 관계를 복원시킬 전략은 없는 겁니까.

"시민사회와 평화운동 차원에서 일본의 양식 있는 지성 및 시민들과의 연대 등을 통해 풀어가겠습니다. 정부가 지원할 것은 지원하고, 네트워크 운동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려고 해요. 일본 내에서도 양식 있는 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과거와 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해 대사를 소환하거나 극단적인 언사를 퍼붓는 게 아니라 냉정하고 차분하게 해나갈 것입니다. 한.일 정상 간 외교나 여러 교류는 스케줄대로 진행해 나가겠습니다."

-우리도 좀 냉정해져야 할 시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독도 문제가 하루아침에 결판날 문제가 아닌 데다 우리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중심을 잡아가야 합니다. 독도 문제가 잘 풀려서 훗날 후손들이 '독도스럽다'는 말을 좋은 의미에서 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에게 독도는 분쟁지역이고 이를 한국이 지금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을 뿐이라고 인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 아닙니까.

"그런 면도 있겠습니다. 긴 호흡을 갖고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반성해야 할 대목은 국사교육 문제입니다. 내년부터는 행시.외시에서도 국사 과목이 빠집니다. 사법시험 과목에서는 김영삼 정부 때 빼버렸고, 국사가 수능시험의 선택과목인데 선택률이 25%가 안 됩니다. 수험생의 75%는 국사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7차 교육과정이 아주 잘못됐습니다. 8차 교육과정을 앞당겨 시행해서라도 이런 문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일본이 왜곡된 역사를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전 세계에 뿌리고 있어 외국인이 일본 역사를 통해 한국을 보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7월 정 장관 부임 이후 남북 당국 대화가 단절되고 있는데 회담 재개의 전망은 어떻습니까.

"통일부를 포함해 외교안보 라인의 초점은 핵 문제 해결과 남북대화 재개에 맞춰져 있습니다. 남북대화야말로 우리의 성패가 고스란히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교착 상태가 길어지는 게 안타깝고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당국 대화 단절과 함께 이산가족 상봉이 중단돼 버린 겁니다.

"지난해 말에 이산가족 면회소를 짓기 위한 지질조사와 측량을 시작했는데 북한이 탈북자 문제를 거론하면서 중단됐습니다. 당국 간 대화 재개와 연동돼 있는 문제입니다. 회담이 열리면 최우선적으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추진하겠습니다."

-미국이 북한인권법을 제정하는 등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어 한국 정부도 스트레스 좀 받고 있을 텐데요. 국제사회의 분위기에 맞춰 북한 인권 문제에 전향적인 입장을 취할 생각은 없습니까.

"미국의 북한인권법 제정으로 탈북자 숫자가 오히려 감소하고 있습니다. 북한인권법의 부작용으로 북한과 중국의 단속이 강화된 결과입니다. 북한의 인권 개선에 실질적으로 가장 큰 기여를 한 나라는 한국입니다. 한국으로 오기를 희망하는 탈북자를 모두 다 받아들이고 있어요. 북한을 규탄하고 압박하는 것보다는 김대중 정부 이후 8년째 해온 화해협력 정책이 북한의 인권 신장에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북한이 요청한 비료 50만t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지금까지는 대체로 20만~30만t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양이 많아 큰돈이 들어갑니다. 국민적 동의가 필요합니다. 회담이 열리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왜 그렇게 많은 지원이 필요한지부터 좀 들어보고 결정할 문제입니다."

-대북 지렛대란 말씀이군요. 당국 간 회담이 안 열리면 비료나 식량지원을 결정할 수 없다는 말씀이군요.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문제는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지금 시점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통일부 장관이 뭐라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남북 간에 막후채널은 가동되고 있습니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의사를 주고받는 채널은 있습니다. 남북관계의 특성상 공개하기는 어렵습니다."

-언제 어떻게 정치로 복귀하십니까.

"저는 국회의원이 아닙니다. 정부에서는 정부 일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제 거취는 임명권자의 의지에 달렸어요.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서 2005년을 한반도가 탈냉전의 대열에 합류하는 기념비적인 해가 됐으면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정리=이영종.서승욱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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