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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현 기자의 문학사이 ⑧ 김해화 ‘아내의 봄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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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해화

문학이 말의 예술이라면, 정치는 말의 기술이다. 말을 다듬는 재주보다 말을 부리는 솜씨가 정치인의 성패를 가른다. 그런 정치인의 말이 막무가내로 쏟아질 때가 요즘 같은 선거철이다. 20일 여야는 19대 국회 입주권을 따기 위한 대진표를 얼추 마무리 지었다. 곧 말들의 전투가 시작될 태세다.

 선거 때마다 남용되는 말은 아마도 ‘서민’일 테다. 후보들은 너도나도 서민 흉내를 내곤 한다.

한 낙마한 정치인이 대통령을 일러 “뼛속까지 서민”이라 불렀을 때, 이 서민이란 말은 정점을 찍었거니와, 표에 정신이 팔린 후보자들은 서로 “내가 진짜 서민”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어쨌거나 정치인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나도 서민이다. 서민을 위해 일하겠다.” 그러면서 재래시장에 달려가 비린내 나는 생선을 주무르기도 한다.

정치인들의 빤한 선거 전략을 욕하기야 쉽지만, 저런 이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내맡겨야 하는 진짜 서민들은 불쌍하다.

 그러므로 서민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후보자의 자질을 따지는 중요한 기준일 수 있다. 서민은 누구인가. 이런 사람들이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손짓해 나를 부릅니다/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이천원에 떨이미 해가시오 아줌씨/할머니 전부 담아주세요/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봄비 값까지 이천원이면 너무 싸네요/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김해화 시인의 ‘아내의 봄비’란 시에서 옮겼다.

서민이란 겨우겨우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봄비 내리는 길가에서 냉이·감자를 파는 할머니, 그 할머니를 지나치지 못하는 아내, 장짐을 든 채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시인. 이들이 서민이다. 아내는 비를 맞으며 장사하는 할머니가 안타깝다. 해서 (아마도 계획에 없었을) 냉이와 감자를 사며 “봄비 값까지” 웃돈 천원을 건넨다.

 저 아리따운 연민이 진짜 서민들의 마음 풍경이다. 이어진 연에서 할머니는 손에 삼천원을 꼭 쥔 채 아내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건 아마도 고마움의 잔향일 테고, 서민끼리의 소박한 연대감일 테다. 시인은 그 뭉클한 풍경을 “꽃 피겠습니다”란 말로 축약해 시를 끝맺었다.

 그러니 국회 입주를 탐하는 자들아, 무엇이 서민들의 삶에 꽃을 피우겠는가. 그것은 “봄비 값까지 이천원이면 너무 싸네요”라고 말할 줄 아는 마음이다.

선거철에나 서민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서민들의 고된 삶을 “뼛속까지”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일이다. 꽃피는 4월, 대한민국은 총선거를 치른다. 봄비는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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