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디가우저로 지우지 못한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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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권석천
사회부문 부장

이인규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 진경락 전 기획총괄과장, 최종석 전 청와대 행정관, 장석명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거나 은폐 의혹의 주역으로 떠오른 면면들이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전도 유망한 엘리트 공무원들이었다. 이 전 지원관은 행시 29회, 진 전 과장과 최 전 행정관은 행시 39회로 고용노동부 요직을 거쳤다. 행시 30회 출신인 장 비서관은 서울시 정책기획관 등을 역임했다.

 반듯한 이력을 가진 이들이 왜 불법에 가담했을까. 어쩌다 돈으로 입막음을 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 것일까. “골프채 한 번 들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법을 지켜왔다”(진 전 과장 ‘오마이뉴스’ 인터뷰)고 자부하는 이들이….

 공직윤리지원관실이 42명의 인원으로 출범한 것은 2008년 7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의 열기가 꺾이고 있던 때였다. 시위대가 서울시청 앞을 뒤덮고 광화문 광장을 컨테이너 박스로 막아야 했던 당시 상황은 집권층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법질서와 사회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이명박(MB) 정부가 내세운 캐치프레이즈는 ‘법치주의 확립’.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 법을 무시하는 행태가 선진화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습 시위꾼에 대해 엄한 처벌과 함께 손해배상까지 받아낸다는 ‘무관용 원칙’이 적용됐다.

 법치주의와 무관용 원칙은 옳은 방향이었다. 문제는 대상이 지나치게 확대됐다는 데 있었다. 범죄와 비리, 불법 집단행동에 엄격하게 적용해야 할 잣대를 표현의 영역이나 법과 거리가 먼 사회적 분쟁에까지 들이댔다.

 불법 사찰이 잉태된 건 정확히 그 지점이었다. 지원관실 직원들에게 ‘은행 협력업체 대표나 되는 사람이 대통령 비방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렸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KB한마음 대표 김종익씨를 사찰한 뒤 경찰에 수사의뢰했다. “법대로 처리하겠다”는 것이었지만 그 자체가 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총리실이 민간인을 조사하는 것도, 영장 없이 압수수색을 하는 것도 불법이었다.

 그러다 2010년 7월 검찰 수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주도면밀한 증거인멸 작전이 진행된다. 파기된 문건만 A4 용지 4만5000장. “망치로 부수든지 한강에 버리든지 물리적으로 없애라”는 지시에 컴퓨터 데이터 삭제 장비인 ‘디가우저(degausser)’가 동원됐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이 전 지원관이 “가장 ‘독한 친구’들만 모았다”고 자랑했던 수사·감사 분야 베테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라진 컴퓨터 데이터에는 정치·경제·노동·언론계를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사찰 내용이 담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디가우저로도 지우지 못한 게 있었으니, ‘MB식 법치’의 한계였다.

 현 정부의 법치주의는 ‘법대로’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①법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주체부터 법적·민주적 정당성을 갖춰야 하고 ②법치에도 소통이 필요하며 ③행정엔 효율성 못지않게 절차적 정의가 중요하다는 개념은 빠져 있었다. 이렇게 브레이크(내부 견제) 없이 질주하는 기관차를 움직인 엔진은 직업 관료들의 맹목적 유능함이었다. 대통령과 그 측근을 정점으로 한 ‘영포(영일·포항)라인’ 같은 비선라인에 대한 충성심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그들의 눈을 가렸다.

 그 결과 한때 촉망 받던 공무원들이 수사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최대의 피해자는 사찰을 받은 이들과 국민일 것이다. 귀중한 세금이 A4 용지 파기로, 데이터 삭제 비용으로, 은폐를 위한 무마비로 날아갔다. 무엇보다 아까운 건 불법 사찰에 동원된 공무원들에게 줘온 봉급이다. 불법을 지휘한 ‘보이지 않는 손’이 누구인지, 시스템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하는 이유다. 그러지 못한다면 한국의 법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디가우저라는 괴물에 가로막힌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