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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우리는 왜 정치에 실망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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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4·11 총선용 공천이 실망감을 잔뜩 키워 놓았다. 여야를 막론하고 공천 과정에서 온갖 잡음과 물의가 끊이지 않았다. 역대 어느 공천보다 소란스럽고 실망스럽다.

 왜 정치는 늘 우리를 실망하게 만들까. 정치인 개인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국회의원을 개인적으로 만나 보면 예외 없이 민주와 법치, 대화와 타협에 열변을 토한다. 논리도 분명하고 소신도 확고해 보인다. 정치의 문제점도 속속들이 짚어낸다. 그런 훌륭한 인물이 정치현장에선 영 엉뚱한 행태를 보인다.

 왜 그럴까. 결국은 개인의 문제보다 정치제도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개개인의 양심과 도덕에 기대를 걸고 기다리다간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국회의원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정치 메커니즘의 정수는 공천이다. 그래서 공천 과정에선 정치판의 문제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반대로 공천 메커니즘을 바로잡는 것이 정치판의 문제를 풀어가는 가장 근본적인 해법이다.

 이번 공천 과정의 문제점을 일일이 거론하자면 끝이 없다.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만 따져보자. 정치학자들은 현재의 우리 정치시스템을 ‘1987년 체제’라고 부른다. 87년 민주화 이후 정치체제의 틀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얘기다. 87년 체제의 최대 문제점은 ‘하향식 공천’이다. 국회의원 후보를 위에서 찍어 아래로 내려보낸다. ‘독재타도’로 민주화는 되었지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핵심과제인 정당 내부 민주화가 전혀 안 되고 있는 것이다.

 YS·DJ로 대표되는 시절엔 하향식 공천이 통했다. 가장 성공적인 공천사례로 평가되는 96년 15대 국회 신한국당 공천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이자 당 총재로서 막강한 권한을 지닌 YS가 전권을 행사했다. 청와대와 안기부(국정원 전신), 그리고 아들 김현철의 비밀캠프가 대한민국의 정치적 자원을 거의 독점했기에 가능했다.

 안기부에서 관리하는 통치자금이 거의 무한대였으며, 후보를 검증하기 위한 정보를 마음대로 수집할 수 있었으며, 필요하면 공천에 반발하는 사람을 주저앉히는 완력을 행사하는 데 걸림돌이 없었다. 모든 지역구별로 방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당선이 유력시되는 후보를 일방적으로 차출하고, 당선에 필요한 돈과 조직을 안겨 지역구로 내려보냈다. 이렇게 해서 당선된 국회의원은 당연히 보스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다. 하향식은 권위적이지만 효율적이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이런 막강한 권력과 무한한 자원을 독점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87년 이후 민주화가 조금씩 사회 저변에 정착돼 왔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적 변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정치체제의 핵심인 공천은 여전히 낡은 방식 그대로 뒤처져 있다. 유효기간이 지난 제도가 계속 탈을 내고, 우리는 계속 실망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당 지도부가 ‘마음대로 공천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외부인으로 공천심사위원단을 꾸리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눈가림에 불과하다. 원칙은 바꾸지 않고 화장만 고친 궁여지책(窮餘之策)이다.

 YS·DJ식의 권위도, 권한도, 힘도 없는 정당 지도자가 하향식을 고집하다 보니 여기저기 부작용만 커진다. 기준이 일정하지 않으니 반발이 많고, 반발을 누를 힘이 없으니 뛰쳐나가는 사람이 많다. 결국 정치세력 간 주고받기로 문제를 풀려 하니 공천에 전략과 개념이 없다. 후보를 스크린할 정보와 능력이 부족하니 엉뚱한 인물을 공천했다가 뒤늦게 갈아 끼우느라 허둥지둥이다. 자기 사람 심으려 지역구 돌려 막기를 하다 보니 전혀 연고도 없는 사람이 지역대표로 떨어진다. 민주적이지도 못하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근본적 해법은 하향식 공천을 상향식으로 뒤집는 제도혁신이다. 정치는 효율에 앞서 민주적이어야 한다. 일부 지역에서 실시된 국민경선이 상향식 공천이다. 이번엔 이마저도 실패작이었다. 원칙은 맞지만 현실이 영 따라주질 못했다. 준비를 안 했기 때문이다. 지난 18대 국회에서 몇 년간 상향식 공천을 하겠다는 말만 했다. 실제로 제도를 고쳐야 할 정치개혁특위는 법을 고치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제대로 하려면 법을 고치고, 선거관리위원회가 나서야 한다. 필요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상향식 시늉만 내려고 하니 돈으로 표를 사는 구태만 횡행했다.

 어차피 이번 공천은 물 건너갔다. 남은 것은 유권자들이 직접 총선에서 표로 심판하는 일이다. 더디지만 그 길이 가장 확실하다. 그나마 차악(次惡)이라도 선택할 수 있기에 선거는 좋은 것이다.